혜시는 유후무후(有厚無厚)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두께가 있는 물체는 각기 얇게 자를 수 있다. 이는 얇게 자른 것을 합쳐 두께가 있는 물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물체를 무한정으로 얇게 자르다 보면 결국 가장 얇은 것은 두께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두께가 있는 것은 두께가 없는 것이 쌓여져 만들어진 것이기에 두께가 없는 것이다. 」

흡사 원뿔을 극도로 얇게 잘랐을 때 이웃하는 두께의 평면의 면적이 서로 같다면 원뿔은 원통이 되고, 서로 다르다면 계단의 형태로 이루어 진 것이 된다는 모순이 생긴다는 데모크리토스의 paradox와 비슷하다. (지금으로 보아선) 어찌 비슷한 시기, 동서양에서 이런 논리들이 나오게 되었을까 궁금하다.

한번 이런것도 생각하여 보자.

 

A지점에서 굴러내린 100㎏의 물체가 C점을 통하는 무렵의 속도는 어떻게 구할까? 흡사 날아가는 화살을 잘게 쪼개보면 정지된 것이 된다는 궤변에서 구하여야 하진 않을까?


그림과 같은 폐곡선의 빗금친 면적은 어떻게 구할까?

      
그림처럼 사각형으로 잘게 쪼개 그 면적의 합을 구하는 것이 미적분이다.

⑴보다는 ⑵가 더 면적의 근사치가 될 것이다. 이 과정을 무한대로 해갈수록 더욱 폐곡선의 면적에 가까운 값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가진 인간의 세계에서는 과연 어떠할까? 사람의 생각과 마음도 무한히 쪼개어 생각하여 볼 수 있을까?

토끼와 거북, 날아가는 화살에 있어서의 연속과 정지, 원뿔에 있어서의 같음과 다름, 대일소일, 유후무후, 미적분과 같은 원과 각의 논리 등은 모두 가능논리이고, 모두 서로 상대적인 개념을 응용하고 있다. 일종의 음양의 관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더라도 별 상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