易无思也 无爲也

「 역은 생각도 행위도 없다. 」

시간과 공간 속에서 천지간의 음양의 운동은 아무런 의지도, 의도도, 조작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글은 유신론자나 공자의 생각과 어긋난 것 같다. 공자가 주역의 괘효사의 풀이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보면 易에는 의지가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天命도 人本도 세울 수가 있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역에 아무런 의지나 조작이 없기에 공자와 제자들은 계사전을 통해 의지를 담으려 했을 것이다. 그래야만 속담에 ' 하늘 무서운 줄 알라. ' 하는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실감있게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앞날이 어떤 절대자의 의지에 달려있는 것일까? 사주팔자에 따라 인간의 미래가 정해져 있는 것일까?

易은 생명체로 말하자면 살아있으려는 생명의 운동, 움직임이다. 자신이 죽고 싶다고 생각해서 죽어지지는 않는다. 용수철이 눌리면 반발하는 것은 용수철의 특성이 그러한 것이다. 흐르는 물을 막는다고 물이 흐름을 멈추는 것은 아니다. 발로 누르면 작은 생명체는 죽는다. 우리가 의지하지 않아도 세포는 분열하고, 증식하고, 소멸하고 있다. 주 문왕이 역을 인간사에 접목시킬 때에는 이러한 易의 특징을 충실히 읽어내었던 것 같다. 그러나 文王의 易에는 君子와 길흉회린(吉凶悔吝)만 있지, 이른바 도덕이나 도리라든가 윤리라든가 하는 것은 거의 없다. 주역의 이러한 면은 공자에 의해 보완되어 거듭 발전되어 졌다. 아무런 의도도, 조작도 있을 수 없는 천지간의 운행을, 즉 하늘의 질서를 알게 된다면 당연히 인간은 자신에게 이롭게 자신의 행위를 그에 맞출 것이다. 그에 따라 약육강식의 세계는 더욱 혼란스러위질 것이다. 공자가 생존하던 당시의 춘추시대가 바로 그러한 시대이기도 했다. - 물론 천지간의 운행이 인간의 역사와 필연적으로 일치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필자는 모른다 - 어쨌건 하나의 거대한 관념이 형성되면 인간은 그 관념에 영향을 받는다.

易을 그냥 두면 교활한 처세가들만 양산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공자와 증자, 맹자 등의 유학자들은 이러한 易의 무의지, 무조작성에 중국적인 도덕적·윤리적 관념을 접목시키려 매우 노력하였던 것 같다. 계사전도 그러한 의도가 보이고 있다. 周易에서의 그러한 면은 천수백년을 더 지나 宋대 주희에 의해서 理의 개념이 재해석되어 도입됨으로써 다시 한 번 발전한다. 周易은 문왕 이후 두 번이 변하는데 2000년 하고도 400년이 더 걸린 셈이다.

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

한국어의 특징 중에는 ' 조사 ' 가 있다. 은, 는, 을, 를, 이, 가, 께서, 에게, … 등 조사는 외국사람이 배우기에는 매우 까다롭지만 당연히 한국사람에게는 매우 편리한 글자이다. 그런데 조사의 사용에 익숙한 한국사람들이 조사를 사용하지 않는 한문을 해석하는데는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서로 다른 문자를 사용하는 민족은 그 언어와 문자가 가진 문법적 구조의 차이에서도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윗 글은 대충 역에는 태극이 있고, 이에서 양의가 나오고, 양의는 사상을 生하고, 사상은 팔괘를 生한다고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사람이라면 이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양의는 음양, 사상은 태·소·음·양을 말한다.

그러나 이 글의 정확한 의미는 우리말로의 정밀한 번역도 중요하지만 문장과 단어를 이해하며, 그 문장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총괄적으로 알아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가령 역유태극만 하더라도 역은 태극이 있다느니, 역은 태극을 갖고 있다느니, 역에는 태극이 있다느니 하며,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되어질 수 있고, 그것에서 연역이 되어 나감에 따라 나중에는 상당히 서로 다른 의미를 이끌어 낼 수도 있게 된다. 그런데 은, 이, 에 등의 조사를 사용치않는 중국인들은 윗글을 어떻게 이해할까? 중국인들은 그냥 ' 역유태극 …… ' 이라 할 것이다.

윗글은 역에 태극이 있고, 이에서 음양이 생긴다거나, 혹 역은 태극을 갖고 있고, 태극은 음양을 낳으며, 음양은 태양, 소양, 태음, 소음을 낳고, 태소음양은 건곤감리진태손간의 팔괘를 낳는다고도 풀이되어 질 수 있다. 우리말 조사에 신경쓰지 말자.

위와 같은 풀이는(양의는 음양을 말하고 사상은 태,소음양을 가리킨다는 말) 주자에 의해서 결론지어진 것이다. 계사전에는 다만 원문처럼 쓰여있다. 원문에 쓰인 有는 자신의 품속에 지갑을 갖고 있는 것을 상상하면 될 것이다. 품안에 있는 것이기도, 갖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易有太極은 역의 체계 속에 태극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단어는 太極이다. 생소한 단어는 아닐 것이다. 태극은 우리나라의 태극기에 나타나 있다. 둥그런 원 가운데 빨강과 파랑의 두 무늬가 그려져 있는 것이 태극기의 모습이다. 역유태극은 역에는 그러한 태극이 있다는 것이다. 혹 역은 그러한 태극이라는 것이다.

유학편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태극은 理이고, 음양은 氣라고 구분지어 놓은 사람은 공자도 맹자도 아니고 주자에 의해서였다.

易有太極

그럼 원래의 太極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太는 사람이 팔을 벌리고 서있는 모양인 大에 생식기가 붙어있는 모습이다. 남자를 뜻하기도 하고 아직 생명의 가능성만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陽이 생겨나는 모습이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크다는 뜻 외에 처음이라는 뜻도 가지게 된다. 極은 끝없이 뻗어나가는 것이다.

소도경전 본훈에서는 極을 무라고 하였다. 비슷한 관념이다. 끝이 없음은 바로 無인 것이다.

朱子는

" 物마다 가장 완전한 형식과 최고 표준이 있는데 이것을 極이라 하며 物마다의 이러한 極의 총화를 太極 "

이라 하였다.

이는 太極에 대한 주자의 견해이다.

주자이전 주돈이는 無極而太極 이라고 하였는데, 여기 쓰인 而자를 놓고도 역접이니 순접이니 말들이 많아왔는데, 필자는 무극과 태극은 같은 것임을 말한다고 풀이하고 싶다. 글자 하나에 얽매여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런데 같은 의미라면 굳이 무극, 태극이라고 나누어 설명할 필요성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의 미적분을 예로 들어 무극, 태극을 설명하여 보겠다.

빗금친 부분은 무극의 상태이다. 여기서 빗금친 폐곡선의 면적을 구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그림처럼 사각형으로 무한히 쪼개 그 합을 구하면 폐곡선의 면적과 유사한 면적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끝없이 무한히 쪼개는 것도 문제니, 대충 쿼크의 단위까지만 쪼갠다고 생각하여보자. 그것이 물리나 수학에서의 태극인 것이다.

그림

AB간의 거리는 몇 ㎝일까?

당신이 자로 AB간의 거리를 잰다면 그것이 인식에서의 태극이다. 우리가 인식하거나 하지않거나 해도 현상은 거기에 있다. 이런 상태가 무극이다. 당신이 어떤 현상을 분석함에 있어 음양의 관계를 이용, 분별해내었다면 그 또한 인식에 있어서의 태극이 된 것이다. 이 정도로 조금이나마 태극에 대한 직관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필자가 미적분의 개념에 대해 모르고 있었거나 혼돈을 겪고 있는 것은 사고 행위에 있어서의 무극이다. 어느 순간 ' 그렇지 ' 하며 깨닫게 된 것은 태극이 이루어진 것이다.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계사전에 易有太極 이라 쓰여있음은 계사전을 쓸 당시 이미 太極에 대한 폭넓은 관념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역유태극은 그 태극이 정확히 무엇을 뜻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에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太極이란 것이 이 易에 들어있다는 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아마 태극은 어떤 절대적인 진리나 가치, 현상 판단의 기준을 가리키는 개념을 가진 말이었으리라 생각된다. 易有太極은 바로 그러한 태극이 역 속에 있다는 말도 되는 것이다. 생각도, 조작도, 의지도 없는 易에는 어떤 불변의 법칙이나 현상의 인식과 판단에 기준이 될 수 있는 太極이 있다는 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