是生兩儀

是라는 글자는 ' 이것 ' 을 지시하는 말이다. 이 문장도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우리말의 조사를 생각하지 말고 원문대로만 생각하자. (즉 중국인들이 하는 방식으로 곧 영어를 말할 때 영어식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

是는 앞문장을 가리키는 것이라 생각된다. 또는 太極을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양의는 음양을 말한다하나, 이 또한 주자가 붙인 주석이다. 兩도 二도 둘을 뜻하지만 양손, 양쪽, 양변 할 때의 兩은 서로 붙어있는 관계를 뜻하고, 二는 숫자, 셈어림을 할 때 쓰이는 차이가 있다.

儀는 義와 人의 合자로서 옳은 사람을 연상하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받는다, 법도 등의 뜻이 나오게 되었을 것이다.

양의는 두 개의 서로 관계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양의는 음양 외에 강유, 동정, 한열 등의 서로 상대적인 개념의 집합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兩儀生四象

상대적인 두 힘 또는 의미, 개념 등이 한층 더 미시적으로 분열, 사상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주자는 양의를 음양이라 하고, 음양에서 태양, 소양, 태음, 소음이 나온다 하였다.

주자의 풀이대로라면




표와 같은 그림이 된다.

이러한 주자의 설명을 비판하고 수정할만한 학문적 깊이가 필자에게는 없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는 바는 조금 다르기에 참고삼아 써본다.

양의는 앞서 말했듯 상대적인 두 힘, 의미, 개념 등을 말하고, 사상은 그러한 상대적인 관계가 한번더 또는 하나더 분화되어 나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별을 하지 않자면 주자와 다를 것도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엄연히 다르다. 필자의 생각대로라면 음양도, 태소음양도, 팔괘도 모두 태극이기 때문이다.

무극이 <그림> 그냥 비어있는 상태이고

태극이 <그림> 원이라면 표A


양의는 <그림> 이런 그림이고 표B



사상은 <그림> 이런 그림을 생각하면 되겠다. 표C


기호편에서 말한






위와 같은 그림도 같은 맥락이다.

역에서 말하는 원과 방 역시 원은 표A 그림, 방은 표C의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태극의 그림은 태극이 양의를 생(生)하여 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논리적인 구별일 뿐이다. 마치 기호처럼 현상계는 무수히 많은 상대적인 것들이 있다. 그리고 태극은 표A,B,C의 그림 외에 팔괘, 64괘까지의 변화에 있어 그 뿌리, 모체가 되는 것이다. 즉 현상계의 무수한 다양성, 다의성을 축약하여 태극기에 나오는 그림처럼 나타낸 것이 위의 그림인 것이다. 곧 태극의 뜻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현상계의 모습이 바로 태극인 것이다. 그리고 또 무극도 되는 것이다. 왜일까? 당신이 없어도 그것은 거기 있기 때문이다. 구름은 항상 한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흐르고 변화하며 흩어지고 모였다가는 비가되어 내리기도 한다. 바로 무극이자 태극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름의 위와 같은 변천과정에서 양의를 이용, 어떤 법칙을 발견한다면 하나의 음양의 법칙을 발견한 것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무극을 태극화 시킨 것이다.

우리앞의 자연현상 뿐아니라 동식물(나무, 꽃, 벌레, 길가의 무성한 잡초), 무생물, 산, 바다도 태극의 모습인 것이다. 또한 무극이기도 하다. 사상은 이러한 태극을 해석함에 음양보다 발전된 개념이자 한걸음 더 나아간 방법론이다. 이는 또한 현상계의 구조가 그리되어 있어서 이기도 하다. 그리고 팔괘는 사상보다 한층더 정밀한 것이다. 물론 현상계를 인식하는 방법에는 다른 방법도 있다. 그러한 방법은 무수히 많은 학자들에 의해 시도되어졌고, 시도되어지고 있다. 그런 사람은 그 방법론으로 행하면 될 것이다. 음양론은 마이다스의 손이 아니다. 다양성이 공존하는 사회가 이상적 사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