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군조선의 쇠퇴와 夷에 대한 견해한단(桓檀)의 여러나라들중 숙신, 쥬신, 조선, 몽골은 지금의 중국북부와 동북부 지방에 살던 나라들을 말하며 이 지역외에 지금의 터어키 지역까지에 걸쳐 매우 광범위하게 고대 桓족은 분포되어 있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언제부터인가 중국인들은 그들의 동쪽과 동북쪽 지역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일러 夷라 부르기 시작했고 스스로를 中이라고 생각, 동이(東夷)라 하였었다. 이(夷)는 공자가 춘추(春秋)라는 책에서 오랑캐라 칭하기 전까지는 유학에서 말하는 군자나 어진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한다. 즉 공자 이전의 어느 시기까지는 夷라는 호칭은 고대 중국인들에게 그리 좋지 않은 의미를 갖고 있던 것은 아닌 것이다. 이때의 " 어느 시기까지 "이후 평가가 바뀌게 된 것은 무슨 원인이 있을 법하다. 아마 단군조선이 계속되는 내부혼란과 분열로 약화된 것이 첫째 이유가 될 것 같다. 단군조선의 무력이 약화되기 시작한 것은 BC 7세기말이 될 것 같다. 이 시기는 관중의 보필에 의해 제나라 환공이 춘추열국의 패자가 되었던 때이다. 이시기 단군 조선은 제나라에 크게 패한적이 있다. 「 기원전 7 세기 말에 조선이 고죽(孤竹)을 의지해서 불리지(弗離支)국과 합하여 연(燕)과 진(晋)을 치니 연과 진이 제(齊)에 구원을 청하였다. 이때 제의 환공(桓公)은 (환이라는 발음은 은나라와 동이문화와 관련이 있던 지역에서는 자주나온다.) 어진 수상 관중 (管仲)과 이름난 장수 성부를 얻어 지나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조, 위, 노 등 10여 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연을 구원하고자 太行산을 넘어 불리지 국을 격파하고 연을 지나서 고죽과 싸워 이겼으므로 조선은 후퇴하여 불리지의 옛땅을 다 잃었다. 」 - 신채호 조선 상고사 中 -
고죽국은 공자가 침이 마르게 칭찬하는 백이숙제가 살았던 나라이고
지금의 요동지역에 있었던 나라이다. 주몽때의 졸본부여 지역의 일부이다. 불리지 국은 산동반도 지역에 있었다. 이때의 단군조선과
제와의 전쟁에 관한 기록은 단군세기에도 나온다. 「 36세 단군 매륵 재위때의 일이다. 무진 52년 (BC 653년) 단제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須臾)의 군대(기자조선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케 하였다. 이에 연나라 사람들이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 제와 조, 위 등의 연합 세력을 말하는 듯 - 고죽에 쳐들어 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서 싸워 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 」 - 단군세기 - 신채호가 쓴 글과는 모순되어 있다. 그럼 변별을 하여보자. 중국인들은 주나라와 그 제후국 이외의 민족을 전부 오랑캐로 지칭하였었다. 그리고 오랑캐의 이름을 여러 가지로 불렀었다. 蠻, 狄, 倭, 夷, 戎 등은 모두 주 와 그 제후국 이외의 나라나 민족들을 한수 아래의 나라나 사람들로 부르던 이름들이다. 이중 이(夷)나 융(戎) 등은 특히 단군조선과 관계가 깊다. 이중 산융 혹 북융이라 중국인들이 부르던 나라가 제환공 당시 연(燕)나라를 침공하였었다. 이들에 대해 고대 중국인들이 변별해 놓은 특징은 침략적이고 사납고 용감하며 배반이 심하였었다한다. 연(燕)의 장공(莊公)은 제나라에 구원을 청하고 제환공은 관중과 함께 출정하여 융을 토벌하고 융의 후원국내지 동맹을 맺고 있거나 융을 보호하던 국가인 고죽국까지 정벌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제환공은 융(戎)과 고죽의 복병에 걸려 매우 힘든 싸움을 하였었다. 아마 단군세기의 기록은 이때의 전쟁의 성과를 기록한듯하다. 이때의 전쟁의 승패가 서로 엇갈리니 어느것을 옳다 맞다 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공자는 이 전쟁에서 결국 제나라가 크게 승리하고 그들이 말하는 오랑캐 중 夷와 戎 등이 이후 중국의 국경을 넘보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그 이후의 결과론을 보더라도 그럴 것 같다.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헤메다 늙은 말을 통해 길을 찾아냈다는 고사(古事)를 만들어낸 이 전쟁에서의 관중의 업적을 공자는 매우 높이 평가한다. 자신이 모시던 먼저의 임금을 죽인 제환공을 따른 관중의 행적을 유교적 입장에서는 깍아내렸지만 관중이 없었다면 중국은 옷깃을 외로 여미는 오랑캐족이 되었을 것이니 오늘날(공자 생존시의)의 중국인은 모두 관중의 혜택을 입고 있다하여 추켜세워주고 있기도 하다. 우리 옛옷은 모두 왼쪽 옷깃이 오른쪽 옷깃 위로 올라간다. 다시 말하지만 이 당시를 오늘날의 민족적·국가적 개념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이 당시는 수많은 종족과 부족들이 지금의 중국영토 전역에 걸쳐 살았으며 특히 접경지역의 사람들에게는 오늘날의 민족적인 생각은 별로 없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공자 생존당시 단군조선과 춘추시대의 동쪽의 여러나라들은 은나라 때보다는 상당히 구분되어져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공자는 주나라 왕실을 인정하는 나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오랑캐라 규정하고 변별 항T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서국(徐國), 남국(藍國) 등의 동이족 국가가 회대와 산동반도 지역에 살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고전에서는 은(殷)나라의 유민들로 불리고 있다. 융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단군조선의 후원으로 혹 단군조선이 직접 중원 내륙 깊숙히 영토를 넓혀 들어가려던 계획은 그리하여 옛 영토를 회복하려던 계획은 실패한 것으로 생각된다. 제나라가 고죽국까지 쳐들어왔다가 화해를 청하고 물러갔건 아니면 제나라가 고죽국까지 정벌했건 간에 제나라는 단군조선의 공격을 막아냈긴 하였을 것 같다. 이 이후 제나라는 그 공로로 춘추시대의 패권을 인정 받앗던 반면 단군조선은 계속 약화되어 갔다. 융은 연나라를 침공하는 과정에서 많은 만행을 저질렀고 어쩌면 그러한 기록이나 그 소문이 과장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간 제환공이 출정할 때 환송을 나와주고 돌아올 때 환영해준 이가 노나라의 장공이다. 공자역시 선조는 동이족과 관련이 깊은 송나라 사람이지만 그 자신은 노나라에서 태어났고 활동을 하였던 사람이다. 노나라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노나라 왕이 제환공의 출진에 환송까지 나온 것은 곡절이 있을 법도 하다. 혹 아직 남아있는 은나라 사람들과 동이족을 그리고 주변의 동이족 국가들과의 역학관계가 걱정되었던 것은 아닐까 한다. 노나라가 위치하던 지역은 옛 은나라가 위치하였던 지역이고 그 종족적인 구성도 소위 夷족과 주나라의 민족이 섞여 살고 있었고 혼혈이 많았을 것이다.전쟁의 승패에 따라 어느쪽으로 기울어질수도 있던 상태였을 것이다. 공자는 이 상태를 당시의 화하족 곧 지금의 중국으로 방향을 돌리고 고정화시켜 놓은 것이라 생각된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니 이유가 분명히 있어 東夷라 부르던 종족을 오랑캐 즉 야만인이라 규정하고 그들과 노나라를 구별하여 놓았던 것이다. 공자가 별 볼일없는 사람이라면 그야말로 별 볼일없이 되었을 일이지만 공자는 아직까지도 중국에서는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니 그의 사고방식과 가르침 역시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공자 이후 동이(東夷)는 군자의 나라에서 오랑캐가 되었다. 반란에 성공하면 영웅, 실패하면 역적식이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동이는 도둑놈의 대명사가 되었다. 아마 공자 이후일지도 모른다. 동이는 중국발음으로 ' 뚱이 ' 이다. 뚱이는 중국에서는 도둑놈을 가리키는 말이다. 자기 영토를 빼앗기고도 도둑놈 소리를 듣게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스스로를 소중화라 하고 동이족이기를 거부하였었다. 동이는 여진이나 말갈족을 일컫는 말이라 생각하였었다. 그러나 껍데기에 줄긋는다고 호박이 수박되지는 않을 것이다. 시바료타로는 주자학을 두고 무서운 환상이라 하였다. 공·맹의 학문이 무서운 환상이라니 지금의 유학하는 사람들이 들어도 큰일날 말이다. 시바료타로는 왜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일까? 하긴 이런 무서운 환상은 오늘날의 종교적 이념적 맹신주의자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한편 夷에 대한 다른 견해도 있다. 「 夷자는 大와 弓의 합자로써 팔을 벌리고 선 큰사람과 그 옆에서 구부정하게 있는 사람을 합친 글자로써 구부정하고 키가 작은 사람이다. 」 - 도오도오 아키야스 - 夷는 난장이를 말한다는 것이다. 도오도오 야키야스라면 꽤 명성이 있는 일본의 중국어 음운학자이다. 夷를 두고 한쪽은 도둑놈 한쪽은 난장이라 설문해자를 한권씩 쓰고 있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이 夷족의 후예가 아니라면 현재 夷족은 거의없다. 그러나 비록 영토표시일 뿐이지만 현재의 국사교과서에도 나와있듯이 여진, 말갈, 만주족들이 살던 지역은 한민족의 원형 형성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오히려 夷족이기를 거부한 조선을 두고 여진족이나 만주족들은 멸시를 하였을 것이다. 삼전도를 생각해보라. 그래도 없애지는 않고 혼찌검만 내주고 돌아갔다. 여진, 말갈, 몽골 역시 한국, 신시, 단군조선에서 나온 같은 겨레인 것이다. 일본 역시 그러하나 겨레라고 하기엔 너무도 못된짓을 많이했다(일본(日本)이라는 글자를 우리 옛 말로 하여보면 해불휘 이다 이는 발음하기에 따라 해부루와 비슷하다. 억단하여 보면 일본은 동부여와 관계가 있다. 해부루는 동부여의 선조이다.) 아마 옛날에 삼국시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나 선비, 모용, 흉노, 돌궐, 말갈, 거란 등도 서로간에 이런 감정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후대로 내려오며 숙신으로도 쥬신으로도 불리는 여러 종족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모두 ' 박달 ' 의 겨레인 것이다. 겨레라는 말은 ' 결 + 애 ' 이다. 결에 대해서는 음양론편에서 말하였었다. 결애는 " 결 " 에 아기, 아이를 뜻하는 " 애 " 가 붙어 결에서 나온 같은 핏줄, 뿌리를 뜻한다 하겠다. 결애 > 겨레는 그 근원이 같다는 말이고 사람, 민족으로 치면 한핏줄, 한뿌리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여기저기 흩어진 여러 한족의 겨레들을 모두 한겨레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겨레란 최소 혈연과 풍습, 역사와 언어가 같고, 생활공동체가 있어야 할 것이다 .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너무 큰 차이로 구별되어져 나간 것이리라. 역사상에서 戎은 사라졌지만 그 글자는 남아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나"를 뜻하는 我자를 보면 융(戎)에 " ノ " 덮개를 씌워둔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공자와 탕의 조상인 설의 어머니인 유융씨는 이름이 간적(簡狄)인데 유융에서의 융이란 글자는 戎(융)의 여자(女)임을 말하고 있다. 중국고서에 마구 뒤섞여쓰는 융(戎)이나 적(狄) 등은 아마 단군조선내에서 오늘날의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식의 지명들이 가차된 글자일 것이다. " 我 " 자는 戎족이 스스로를 가리키던 말을 글자에 나마 남겨둔 것은 아닐까? 나를 뜻하는 말중에는 俺자가 있다. 奄(엄)은 단군조선 중의 국가중 徐國, 藍國 등이 수도로 정했었던 곳이다. 奄에 イ 을 보탠 俺은 奄의 사람이란 뜻이 될 것이다. 필자가 너무했나? 논어 등에는 " 나 " 를 " 吾 " 로써 표현한다. " 吾 " 자는 지금의 한족들이 사용하던 글자는 아닐지? 추측과 상상일 뿐이다. " 徐國 " 은 후에 " 신라 " 로 옮겨온 것 같다하였었다. 신라의 수도 새라불은 한자로 徐伐, 徐羅伐이었다. 왜 徐라는 글자를 썼을까? 혹 전에 쓰던 나라 이름을 신라로 개칭하기전 임시로 쓰게 된 것은 아닐까? 주나라 목왕(穆王)때 주나라와 전쟁을 한후 회대지방을
차지하여 중원대륙에 대제국을 이룩했었다던 서언왕(徐偃王)의 大徐제국이 바로 徐國이다. 주선왕때 회수지역의 서(徐)라는 나라와
결전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시경 대아(大雅편 常武)에 나온다. 물론 지극히 춘추적인 필법(중국의 수치를 숨기고 중국을 높이고 다른
나라를 낮추는 것)에 의해 쓰여져 있다. 노(魯)나라는 역사상 약소국이었으나 그 왕실은 중국 최고의 성인이라할 주공(周公)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었다. 노나라는 희공(노장공의 아들) 당시 국세를 좀 떨쳐본듯하다. 시경 노송(魯頌)편 비궁(비宮)에
보면 노(魯)나라가 서(徐)나라를 이기고 바다에까지 나아가 회이(淮夷), 만(蠻), 貊(맥)에게까지도 군림했다는 시가 나온다.
춘추필법일 이 시는 貊(맥) 역시 지금의 태백산맥 동쪽이 아니라 산동반도 이남의 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貊 역시
시경에 자주 나온다. 고대 중국인들이 오늘날의 원산이나 강릉지역까지 진출 했었거나, 알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徐나라는 이미
유교의 영향도 상당부분 받았을 것이다. 마한의 왕이 죽었을 때 전날의 치욕을 갚기위해 마한을 공격하자는 신하들에게 박혁거세는
타인의 불행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하다는 유학적인 말로써 그 계획을 물리치는 이야기가 삼국사기에 나온다. 서(徐)나라가
신라의 전신이라는 가정하에 이런 글을 써보았다. 이 글 뿐 아니라 이 단원 모두는 역사를 필자가 독단적으로 이 책 저 책에 있는
내용들을 이리저리 뒤섞어 엮어본 것 일뿐임을 말하여 두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