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웅이야기 Ⅱ (규범을 중심으로 검토)

2편 사단론에 들어가기전 " 한웅이야기 " 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앞서 한웅이야기 속에 담긴 교훈의 의미를 연구하여 보았다.

필자는 이외에도 한웅신화속에는 " 정당화의 논리 " 와 " 근친결혼의 금지 " 의 내용이 들어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책에서는 주로 한웅이 호족이었다는 가정하에서 이야기를 펼쳐보려한다.

1) 정당화

한웅이야기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 정당화 " 혹 " 합리화 " 논리가 있다. 정당화나 합리화중 어느 것이 먼저 이루어졌든 나머지 하나도 뒤이어 나왔을 것이다. 물론 이긴자만 할 수 있는 논리이다. " 한웅이야기 " 는 한웅이 어째서 웅녀와 혼인했는가에 대한 정당성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호녀는 규율을 못지켰기 때문에 선택되지 못한 것이다. 한웅신화속에는 이 혼인 이후 호족과는 끝내 천업을 함께 할 수 없었다(신시본기). 범무리는 끝내 그 성질을 고치지 못하므로 사해로 내쫓았다(삼성기전 하편)고 되어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한웅은 호족도 웅족도 아닌 천손족이나 태양을 믿는 부족의 사람이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또한 한웅(환웅(桓雄))은 그 雄(웅)자가 곰웅(熊)자와 다르지만 웅족이었다고 할수도 있다. 웅자로 발음되는 한자는 이 두자뿐이기도 하다. 호족이 끝내 고치지 못한 성질은 무엇일까? 규율을 못지키고 참을성이 없는 것이었다. 한웅이 쫓아냈다는 호족이 호족의 일부인지 호족의 전부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원래 한웅이 같이 살던 무리는 범무리였다.

「 밀기에서 말한다. 한국의 말기에 (한웅이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 바로 전) 다스리기 어려운 강족이 있어서 걱정거리였다. 한웅은 마침내 삼신으로써 가르침을 만들고 전계 - 규율, 규칙 - 를 베풀어 무리를 모아 서약을 시켜 선악을 상주고 벌주는 법을 갖게 하였다. 이로부터 슬그머니 토벌하여 벌할뜻을 품었다.

이때에 무리의 이름은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고 풍속도 오히려 점점 달라졌다. 원래 살던 무리는 범무리였으며 새로 살기 시작한 것은 곰무리였다. 」

- 삼성기 -

다스리기 어려운 강족이란 어떤 종족이었을까?

슬그머니 토벌, 벌할 뜻을 품었다하여 놓고는 생략된 건지 기록이 분실된 건지 이어지는 내용이 서로 맞지 않는다. 위의 기록만 가지고 생각할 때 A라는 무리는 어느 시기에 다른 무리 B와 접촉하게 되었다 생각된다. A무리의 지도자들은 우선 자신의 무리의 질서를 다지고 난후 B무리를 토벌하려 했지만 B무리 역시 만만치 않았고 그 과정에서 A무리와 B무리는 접경되는 지역에서는 서로 섞여 살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두 무리는 점점 접촉이 빈번해지고 A무리가 B무리의 영토까지 들어갈 필요성을 느꼈거나 B무리가 이미 A무리의 영토 깊숙히 까지 들어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면서 서로의 풍속과 풍습도 영향을 끼치고 변화를 겪게 되었고 또한 자신의 무리와 남의 무리를 구별하기 시작했다는 가정을 하여 볼 수 있다. A무리는 범무리 B무리는 곰무리라 할 수 있다. 사람들 사이 일어나는 일이 옛날이었다고 지금과 달랐을리는 없다. A무리와 B무리는 상호 충돌도 하고 경쟁도 하고 협력도 하는 관계였을 것이다. 이질적인 문화끼리의 접촉중에 일어나는 혼란상태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 한웅 " 이 부각되었던 것은 아닐까 한다.

민족 고유의 삼신 사상에선 " 한웅 " 은 신(神)으로 받든다. 아니 하느님의 아들이기도 하다. 한웅은 A무리와 B무리의 실질적인 통합을 주도하려 하였던 것 같다.가장 좋은 통합의 방법은 A무리와 B무리간의 혼혈 즉 서로의 무리간에 혼인을 통해 피를 섞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 때 곰무리와 범무리에선 각자의 여러 가지 이해관계와 풍습이나 갖가지 이유에 의해 반대하는 일부의 무리도 있었을 것이다. 한웅은 이들 여러세력들을 효과적으로 통합시키기 위해 무언가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겨야 했을 것이다. 최대한으로 원래무리의 이탈을 줄이고 다른 무리와는 최대한의 순조로운 통합이 필요했던 것이다.

두 마리 토끼라고 할 수도 있는 이 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웅은 곰무리의 여인과 혼인을 맺는 모범을 보이려 했던 것 같다. ( 이상은 한웅이 새로 등장한 무리와의 대결보다는 통합을 택했다는 가정에서이다.)

「 범무리의 성질은 잔인한 짓을 즐기며 탐욕이 많아서 오로지 약탈을 일삼았고 곰무리의 성질은 어리석으며 또 자만에 쌓여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비록 같은 굴에 산지는 오래 되었다 하더라도 날로 멀어지기만 해서 일찍이 서로 도울줄도 몰랐고 혼인도 터놓고 한적이 없었다. 일마다 서로 다르지 않았고 모두가 하나같이 그 길을 같이 한적이 없었다. 」

- 삼성기전 하편 -

한웅이 혼인이라는 이러한 결단을 내리게된 배경에는 아마 범무리와 곰무리는 서로 좋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필요에 의해 오랫동안 서로 같이 왕래하며 살고 있었기 때문일수도 있다. 앞서 말했듯 주로 범무리는 양(陽)인의 성질이 확대되어 있으며 유목·수렵문화구조를, 곰 무리는 음(陰)인의 성질이 확대되어 있으며 농경문화 구조를 갖고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모르긴 몰라도 범무리가 보기에 곰무리는 느리고 미련하며 고집세고 앞뒤가 꽉 막혀있고 그러면서도 사나운 면이 있었을 것이고 곰무리가 보기에 범무리는 게으르고 남의 것을 빼앗을 생각이나 하고 난폭하고 일하기 싫어하고 돌아다니기나 좋아한다고 생각하였을 수도 있다. 서로 배타적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 한웅은 곰무리와의 통합을 결정하고 몸소 곰무리 여자와 혼인을 맺기로 작정하고 실행에 옮긴 듯 하다. 이는 범무리에서 보면 유목·수렵문화에서 농경문화로의 전환이나 농경문화의 수용일 수도 있다. 물론 곰무리, 범무리 모두에서 반대가 있었을 것이다. 이질적인 문화를 받아들일 때는 항상 진통이 있다. 특히 범무리에서 큰 반발이 있었던 듯 하다.( 한웅이 호족이기에) 당시는 그 어미가 누군가에 따라 소위 핏줄을 확인하고 가족을 구분하는 시기였다. 姓씨라는 단어가 만들어지게 된 까닭은 옛날에는 어느 여자에게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소속과 가족, 크게는 핏줄의 내력까지 알수있기에 그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는 수렵문화를 가졌을 것으로 생각되는 범무리에서는 어머니에 의해 친족구분을 하였을 것이다. 당시도 오늘날과 같은 남성위주의 힘에 의한 세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간 여자에게서 아기가 태어나니 어느 여자의 자식인가에 따라 그사람이 " 누구인가 " 를 밝히는 것이 가장 알기 쉽기도 했을 것이다. (유태인은 모계로써 그 혈통을 구별하고 유지하여 왔다고 한다.) 실정이 이러하니 범무리의 사람들은 곰무리의 여인과 혼인을 하여 자식을 낳게 되면 태어나는 사람은 " 범무리 " 가 아닐 " 곰무리 " 가 된다고 생각했을만도 하다. 이는 범무리의 여인이 곰무리의 남자와 혼인하게 되면 그 반대가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일부일처제의 시대는 아니었을 것 같다. 또한 잡혼의 시대였다면 근친간의 혼인이 순수한 혈통을 보존하는 최소한 그 아비도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때는 협의에 의했든 합의에 의했든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시대도 아니었을 것이다. " 왕 ", 비슷한 제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리 큰 절대권력을 갖고 있지도 않았을 것 같다. 이때 한웅이 결정한 이런 혼인의 방법은 어느정도 전통이 되었던 것 같다. 지배층 일부인지 전 종족적인 범위까지 였는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이후 1500년 후에 단군조선을 세우는 왕검도 熊氏(웅씨)의 왕녀 소생으로써 그 핏줄의 내력이 나와있다.

「 어떤이는 범무리는 남성역할을 맡고 있던 겨레이고 곰무리는 여성 역할을 맡았던 겨레라고 한다. 한웅이 속했던 무리는 곰무리도, 범무리도 또는 곰토테미즘 문화도 범 토테미즘 문화도 아닌 태양신을 믿는 무리였었다고도 한다. 그리하여 한웅의 무리는 곰토테미즘을 믿는 무리와 결합했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熊氏의 여인도 애당초 없었다는 사람도 있다. 熊은 곰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译 즉 누런색 즉 땅을 뜻한다는 것이다. 」

한웅은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며 (혹 이미 실행한 후일 수도 있다.) 그 내력을 자신의 무리에게 알리고 동의를 구하거나 납득시킬 " 무언가가 "곧 명분이나 당위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별거아니다. 중세 유럽에선 영국의 왕녀가 덴마크로 시집가고 독일의 왕손이 프랑스의 왕족에게 장가가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선 본국의 왕이 되어 돌아가기도 하였었다. 볼모일 수도 있고 정략적인 혼인일수도 있었다. 춘추전국시대를 보더라도 이런예는 흔하게 있다. 그러나 처음 이런제도가 시행될때는 특히 전 부족적으로 시행될때는 진통을 겪기 마련일 것이다. 어쩌면 곰무리는 이런제도에 더욱 적극적 이었을 것 같기도 하다.

「 이에 이르러 곰무리의 熊女君(아마 이제는 君이라는 존칭을 써준 것 같다. 女라는 글자가 가진 뜻에 집착할 필요도 없다. 女眞족이 참된 여자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하지 않듯이 말이다. 우리말 " 여 " 또는 만주어로 " 女 " 가 가진 발음 " 여 ", " 려 ", " 예 " ," 요 " 는 모두 동이족 계통의 종족이었다.) 은 한웅이 신과 같은 덕이 있다 함을 듣고 무리를 이끌고 찾아와 말했다. 원컨대 한굴에 사는 저희들을 위하여 굴하나를 내려주시고 신계(神戒)의 무리로 받아 주옵소서 하니, 한웅이 이를 허락하시고 저들을 받아들여 아들을 낳고 산업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범무리는 끝내 그 성질을 고치지 못하므로 이를 四海로 내쫓았다. 桓族의 일어남이 이렇게 시작하였다. 」

- 삼성기전 -

이런 서술을 곧이 곧대로 연역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모든 것을 내눈에 맞게 고쳐질 것이다. 또한 이 이야기가 한웅시대에 만들어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내려왔을 수도 없을 것이다. 단하나 뼈대는 변함없을 것이다. 한웅이 왜 웅족의 여인과 혼인하기로 했냐는 것을 범무리에게 납득시킬 명분은 (혹 트집일수도 있다) 범무리여자의 참을성 없음과 규율을 못지키는 것이였다. 유목·수렵문화속에서 자란 범무리의 남자들과 여자들은 일정한 거처에서의 부부생활이나 일부일처가 거의 없었을 것이고 아마 거의 난혼이거나 잡혼 또는 그 반발로 완전한 근친간에 결혼을 하였을 것이다. 유족, 수렵을 위주로 하는 범무리는 기마민족을 가리킬 수도, 북방계열의 민족이었을 수도 있다. 이동을 많이하고 정착에 익숙치 못한 범무리의 여인네들은 아마 오늘날의 여자들보다 훨씬더 자유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 같다.

반면 정착과 농경을 위주로 하였을 것이라 생각되는 곰무리는 천막이나 야영이 아닌 어느정도 집이라는 것도, 가족이라는 개념도 범무리보다 상대적으로 분명하였을 것이다. 곰 무리의 여인들은 요새말로 좀 집안일에 익숙해 있었을 것이다. ( 또는 삼성기전의 글처럼 한웅이 속해있던 종족은 땅을 ⊓형태로 파서 밑부분에 들어가 생활하는 굴 생활을 하고 있었고 아직 이런 기술을 갖지 못했던 곰무리와 범무리가 통합을 위해 찾아 왔을 수도 있다. )

한웅은 바로 그런점을 " 웅족의 여인 " 을 아내로 맞기로 한 소위 구실이나 명분으로 내세운 것 같다.

이는 수렵이나 유목외에 정착생활을 하는 농경문화를 시작하겠다는 의도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바람처럼 떠돌아 다니는데 익숙한 범무리에서는 당연히 정착할 것을 요구하는 한웅의 요구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속에서 한웅은 범무리 여인의 " 단점 " 을 내세워 " 곰무리 여인 " 과 혼인 하였다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실제 범무리 전체를 쫓아냈을 수도 있다. 이 경우는 한웅은 웅족도, 호족도 아닌 별개의 다른 부족일 것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의 이야기는 삼성기 하편에 나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속에 살고 있으면서 늘 한웅천왕에게 사람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이에 한웅이 신령스러운 효험을 가진 쑥한줌과 마늘20쪽을 주면서 너희가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인간의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 했다. 곰은 이것을 받아 먹고 삼칠일 동안 조심했더니 여자의 몸으로 변했으나 범은 금기를 지키지 못해 사람으로 변하지 못했다. 」

- 삼국 유사 -

수없이 반복하지만 이 이야기를 과학의 잣대로 생각할 수는 없다. 또한 일연이 불교도 였다는것도 생각하여야 하고 이 이야기는 일연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 어느 책 " 에서 인용하여 쓴 것도 생각하여야 한다. 발고개, 박고개가 세월이 흘러 배오개가 되고 박달이 배달로 발음되듯 말은 말대로 변하고, 기호는 기호로써 전해지고 해석되고 인간의 관념이 개입되면서 처음의 " 이야기 "혹, " 이야기들 " 역시 많은 개인의 주관이 가감되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태백일사에 나오는 한웅 이야기의 앞부분은 삼국유사와 유사하다.

곰과 호랑이의 양가는 모두 이를 - 쑥과 마늘 -얻어 먹고 조심하기 삼칠일에 스스로 수련에 힘쓰니 곰은 굶주림, 추위, 아픔, 고통에 견디어 경계함에 순종하고 한웅의 약속을 지켜 건강한 모습의 여자로 되었지만 호랑이는 태만하고 조심스레 경계를 지키지 못하였으니 끝내 천업에(天業)함께 할 수 없었다. 이것은 둘의 성질이 서로 닮지않은 모양이다. 」

이것이 범무리와 천업을 함께 할 수 없다는 또는 함께 하지 않게 되었다는 그 이유이자 명분이다.

한웅은 이런 이유로 곰 무리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어쩌면 그 당시 한웅은 곰무리 여자와 범무리 여자를 놓고 한여자를 골라야 하는 상황에서 두 여인을 놓고 이런 시험을 거치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한웅은 이런 이유로 곰무리의 여인을 맞아들이고 이후 본격적인 두 부족의 통합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정당화란 법률제정자가 그 법을 하나의 규범으로 공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 과정이다. - 리오타르 , 포스트모던의 조건 中 -

냉소적으로 보면 합리화나 정당화란 이긴자가 내세우는 힘의, 진자가 내세우는 변명이나 자기긍정의 행사일 뿐이다. 힘이 정의이고 규칙이고 법인 셈이다. 논리와 구실은 단지 이유나 될 수 있는 것이다.

한웅이 " 정당화 " 시킨 규범과 논리는 이후 두 무리에게 표준이 되거나 강제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간이 흐르며 그것은 또 자연스런 전통으로 되어 갔을 것이다. 이 때 통합에 반대한 무리는 중이 절을 떠나듯이 스스로 아니면 강제적으로 떨어져 나가고 그들은 또 독자적으로 그들만의 문화와 국가를 형성시켜 나갔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같은 무리끼리의 혼인의 전통이 남아 있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남아있던 무리에게도 그러한 관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한국에서는 신라, 고려 시대 심지어 그토록 윤리를 따졌던 조선시대 까지도 근친간의 혼인은 많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조선은 많지는 않았다 세조때와 안동 김씨 집권때이다.) 한나라 당시 중국인들이 한족의 한 갈래인 흉노를 멸시하던 첫째 이유가 근친간의 혼인에 있었다. 그러나 근친결혼은 잡혼과 난혼의 문화속에서 혈통을 보존하기위한 행위였을 수도 있다.

이상의 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웅이 속한 무리는 범무리였으며 이러한 글들은 한웅이 스스로의 행위를 정당화하며 범무리에게 교훈을 주고자함이 일차적인 목적내지 의도라는 것이다. 범무리는 참을성이 없고 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이유로 인해 벌 내지는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는 것을 널리 알리려 했다는 것이다 (편의상 '한웅이야기'의 내용을 몇가지로 분석하고 있으나 한웅이야기 속에는 교훈의 의미가 정당화의 논리와 함께 구상되어 있다).

「 너희들 호랑이 무리를 보아라 힘만세고 난폭하여 신령스럽지 못하고 비천하게 되어버렸다. 」 - 단 군 왕 검 -

「 단목이 무성한 그늘에서 곰, 호랑이와 더불어 노닐며 소와 양이 크는 것을 보았다. 」

- 단 군 세 기 中 -

「 오호라 신시(神市 :혹 신불로 읽어야 된다고도 한다. )는 천황께서 세우신 이름으로 이제 이미 삼신상제(三神上帝)께서 열으신 끝없는 큰 은혜를 받아 웅호(熊虎)를 잘 다스려서 이로써 세상을 안정시켰다. 」

- 소도경전 본훈 中 -

이상의 글들에서 알 수 있듯 범무리는 한웅이후 1500년이 지난뒤의 단군왕검 때에도 단군조선 곧 桓의 영토내에 같이 살고 있었다. (사실 한웅을 곰무리도 , 범무리도 아닌 하늘이나 밝음을 믿는 종족으로 생각하는 것이 편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은 차칫 신비적으로 흐르기 쉬울 것이다.) 어차피 한 무리 , 즉 한겨레의 입장에서 범무리에게 교훈을 즉 참을성을 기르고 규칙을 잘 준수하라는 가르침을 한웅신화는 담고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행위에는 정당성을 부여하고 호족에게는 교훈을 줌으로써 스스로의 행위를 합리화하고 있는 것이 한웅이야기 속에는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훈은 한웅이 속했던 종족이 곰무리나 범무리가 아니였더라도 가능할 것이다. 참을 성이 없고 즉 성급하고 규칙을 잘 준수하지 못하는 특성 한, 중, 일 삼국중 어느나라 국민의 특성인 것 같은가? 한국사람은 곰과 호랑이중 어느 동물에 호감을 가지고 있을까? 한웅신화는 비단 7000년 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깊게 이야기 되어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