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형성과정

한단고기에 보면 桓族(桓族은 숙신, 몽골, 흉노, 퉁구스, 왜, 여진, 말갈, 흉노, 융족 , 선비, 거란 등을 총칭한다 .)들은 이주하고 정착할 때마다 " 나무 " 를 심어 경계의 표시로 삼았다 하고 있다. 이 나무는 살아있는 나무가 아니라 장승과 같은 형태의 나무였을 것 같다.

이 당시는 오늘날과 같은 민족적 국가적 집단사회가 아닌 여러 부족들이 여기저기 산재되어 살고 있던 때였다. 국경선 개념도 오늘과 같지 않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있는 각 부족마다 고유의 관습이나 종교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고, 국가라는 것도 느슨하다 할 정도로 결합되어 있었을 듯 하다 막말로 걱정없이 먹고 살게 해주면 그쪽으로 속해살던 시대였다. 서로간에 경제적인 유대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면 거기다 생활 공동체까지 이루어지면 그들끼리 국가가 될 수 있던 시대였다. 이런 상태에서 소위 중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東夷족 즉 단군조선이 BC 2333년 왕검에 의해 개국된 것이다. 단군조선이 개국되기 이삼십년 전쯤 부터 황화유역을 통치하고 있던 사람이 요(堯)임금이다.

「 옛 요임금을 돌이켜 보건대 이름은 방훈(放勳)이며 공경스럽고 글과 생각이 밝아 두루두루 평안하였으며 진실로 삼가고 겸손하여 그덕이 사방에 비추고 위아래에 즉 하늘과 땅사이 모든 것에 가득찼다. 」

- 서경 中 -

공자도 높게 평가했듯 낫긴 난 사람이었나보다.

요순시대 할 때의 순은 요임금 다음에 임금이 된 사람으로 요는 순에게 그의 두딸 아황과 여영을 시집보내고 사위로 받아들여 왕위를 계승케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시대 경문왕(景文王)은 헌안왕의 두 딸중에 먼저 언니를 취해 아내로 맞았다. 그후 헌안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왕위는 큰사위인 응렴(경문왕의 이름)에게 돌아갔다. 그후 그는 언니보다 아름다운 동생도 아내로 맞아들인다. 순임금처럼 자매를 모두 아내로 맞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단군세기에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 갑술67년(BC 2267) 회대지방을 평정하여 분조를 두고 이를 다스렸는데 우순에게 그 일을 감독케 하였다. 」

- 단군세기 -

역사는 너무도 당연하겠지만 기록하는 사람이 소속된 상황에 의해 주관적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의 기록을 믿지 않을까. 간단하다 .기존의 학식을 가진 사람들이 배운 것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이 외국의 학자들보다도 더욱 우리의 역사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전 어느 신문에서 본 것인데 중국학자들에 의하면 아주 오랜 과거 어느때 황하유역에서 강력한 두 부족이 연맹을 맺고 있었는데 그 통치자는 두 부족에서 번갈아가며 맡아 보았다고 하는 글을 본적이 있다. 아마 두부족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우(虞)나라와 은나라였을 것 같다. 은나라의 왕이였던 "무정" 이전까지만 해도 이 전통은 내려왔을 것 같다. 이 때의 두부족 중 한 부족의 절반정도는 지금의 중국인들의 조상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동이(東夷)족이라고 부르는 단군조선의 주력민족인 한(桓)족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맹자(離婁章)에 순임금은 동이(東夷) 사람이라 하고있는 것을 보아도 순임금은 소위 夷족의 인물이었으며 아마 황하유역 동이(東夷)족의 통치자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요순시대는 중국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극동지역의 역사책들은 대폭 수정되어 져야 할 것이다. 단군조선은 " 전설의 고향 " 에서나 이야기 될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로써 검토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 넘어야 할 산은 많고 많다. 그런데 우리가 넘어야할 그 산은 바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로 막고 있다.

「 우리나라의 「 표준국어사전 」에도 단군조선, 기자조선 등은 연표조차 붙이지 못했다. 불확실한 신화시대를 우리의 정사에 집어넣고자 힘쓰는 사람들의 의도는 흡사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아시아 대륙과 미국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던 시절 그 옛날의 일을 미국사에 정식으로 포함시키려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물론 그런 얼빠진 미국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고구려, 신라, 백제가 우리에게는 확실한 역사의 시작이다. 이 나라들이 출발이 대개 기원전 60년에서 20년 사이라는 말은 이나라의 역사가 한 2000년쯤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부끄러워 할 것도 떳떳하지 못할 것도 없다. 」

- 김 동 길 -

이 분은 중학생도 초등학생도 아닌 이나라의 대표적인 지성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중 한명이다. 알렉스 헤일리의 " 뿌리 " 라는 소설과 드라마가 있었다. 20세기를 사는 한 흑인이 자신의 선조의 뿌리를 더듬어 올라가 마침내 아프리카 까지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김교수에 의하면 아마 이 흑인은 얼이 빠진 사람인 듯하다. 그는 지금 미국땅에 살고 있고 그의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그러하니 그는 미국땅에서 잘 살면 그만인 것일까? 사뭇 미래지향적인 김교수의 글은 역사에 대해서는 이 나라 민주화에 대해서보다 깊지 못하다. 이 나라 역사보다 그런거 모르고도 잘 살고있는 " 미국사 " 에 더 관심이 많아서일까? 청교도 정신아래 ' 개척 '이라는 구호로 수백 수천만의 그곳 원주민들을 죽이고 세운 국가는 어느나라일까? 이러한 대살륙으로 빼앗은 역사를 미국사에 넣으려는 얼빠진 미국인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한국인은 많았었다.

「 나로써 보건대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적인 전쟁에서 보다 곧 조선사를 저술하던 그 사람들의 손에 의해 더 없어졌다고 본다. 」

- 신 채 호 -

조선사를 저술하던 사람들은 누구일까? 단지 역사를 저술한 사람들에 의해 조선의 역사가 없어졌을까? 아니다. 그저 우리주변에 아직도 흔하게 있는 그런사람들이다. 그들이 그러한 문화구조를 만들고 그러한 글을 쓰게되는 풍토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들은 외국의 문화를 수용, 한국적인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거의 그대로 모방하고 흉내낸 사람들일 것이다. 하긴 논리란 힘이 있거나 말 잘하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니 많이 배운 사람들의 논리는 더욱 그럴 듯하다.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와 비슷했다 하는데 이들은 논리력과 지식과, IQ만 진화하였지 원숭이와 별반 다를바 없는 사람들이다. 지금도 주변에 흔한 사람들이다. 역사를 제대로 모를때 쇼비니즘도 나타날 것이다.

「 공구의 춘추를 역사의 절대적인 준칙으로 알아 그 의례를 본받아서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억누르기를 위주로 하다가 민족의 존재를 잊으며 중국을 숭상하고 이 민족을 배척하기를 위주로 하다가 마지막에는 자기나라까지 비방하는 편벽된 논란을 벌임이 셋째 유감이요 」

- 신 채 호 -

옛날과 다른 점은 단지 그 사용하는 ' 이론 ' 이 달라졌다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경향은 지금은 한국에서는 " 구조 " 가 되어있어 악순환을 만들고 있다. 아직껏 우리나라에는 "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기준 " 도 없는 셈이다. 2000년도 더 전의 인물인 " 공자의 역사관 " 이 500년이상 이 나라 학자들의 머리속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 한국적인 주관성 " 이 없는 것은 가치관의 혼란만 일으킬 뿐인 것이다.

쉬운예로는 이러것도 있다. TV에서는 수양대군의 왕위찬탈과정을 몇번씩이나 드라마로 만들면서 이 나라의 뛰어난 임금이나 인물이었던 세종이나 이율곡 이황 등등에 대해선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아마 이들을 드라마로 했다간 시청율이 떨어져서 일 것이다. 그러니 그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은 그 드라마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이런 것은 공영방송의 책임이 더 클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주장한다. 마치 기자들이 "국민의 알 권리"를 전가의 보도로 써 먹는 것 처럼. 시청자들은 똑똑하다고 .......

오늘날에는 " 기독교적 " 역사관, " 실증적 " 역사관, " 유물론적 " 역사관까지 겹쳐 " 역사관 " 의 혼돈은 계속되고 있는 상태이다.

꽤 많이 팔린 책을 써낸 어느 작가는 이순신이 일종의 자살을 했다거나 자살로 위장하고 숨어 살았다는 설 등을 주장하기도 하고, 일본과의 마지막 해전에서 스스로를 영웅화 시키기 위해 일종의 자살을 했다거나 항복을 하고 퇴로를 열어달라는 적장의 요구를 거절한 것은 그 당시 동양무사의 예의와 법도가(항복한 장수는 죽이지 않는다는) 아니라고 까지 하였다.

이 작가는 일본소설 ' 대망 ' 은 읽어보고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그 예의와 법도를 어떻게 생각하고 이런 말을 하게 되었을까? 당시 왜군을 모조리 바다에 쓸어 넣어 버린 뒤 일본의 교토나 오사까 까지 쳐들어가 항복을 받아내지, 못한 것을 아쉬워 해야하지 않을까?

불시에 남의 나라에 침략, 그나라 사람들을 마구죽이고 코와 귀까지 베어가는 것은 그 당시의 예의와 법도인가? 백보양보하여도 항복한다면 의당 적장은 예의를 갖춰 찾아와 항복문서를 건넨다거나 그 당시 일본측의 예의와 법도처럼 나머지 사람들의 목숨을 부탁하며 스스로의 배를 가르고 목을 바쳐야 할 것이 아닌가? 어쨌건 남의 나라의 민중과 강토를 유린했으면 정중히 사과하고 이쪽의 처분에 맡겨야지 대단히 미안하다, 돌아가겠으니 길을 비켜주시면 고맙겠다를 항복으로 받아들일수는 없는 일이다.

이 분은 오늘날 일본정치인들이 행하는 말들은 듣고 있는지 모르겠다. 과거를 잊으니, 주체성이 없으니 수탈을 가했던 민족에게서도 괄시를 받는 것이다. 하긴 이런 행위들을 비난할 수도 없다. 이러한 주장들이 먹혀 들어가는 풍토·문화 즉 구조가 문제이다.

다시 요순시대를 말해 보겠다. 단군왕검은 단군조선 변방지역의 통치를 순에게 맡겼고, 순이 통치하고 있던 지역은 요임금이 통치하던 나라와 경계를 이루고 있던듯하다. 현대처럼 민족과 국가 그리고 국경선 개념이 불분명했던 당시에는 두나라가 혹 두부족이 연합이나 연맹같은 것을 맺고 서로 번갈아가며 통치했을거라고 생각된다. 아마 양자강과 황하사이 회대지역을 중심으로 이러한 통치형태가 이루어졌을 듯하다. 이때의 요와 순이 통치하던 지역에서 두 집단의 부족들이 어떠한 형태로 섞여 살고있었는지는 모른다. 또한 순이 이 지역을 통치하며 단군조선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순이 다스리던 부족을 단군조선에서는 제후국으로 생각하고 있었거나 그 지역 여러 부족들이 순의 책임하에 있다 생각하고 순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고 있던 듯하다. 그러던 것이 단군왕검이 죽고 2세인 부루가 즉위할 때에는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