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양인의 노여움은 교우에 대하여 용감히 통솔하는 때문에 교우 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업신여기지를 않고 태양인의 기뻐함은 당여에 대하여 바르게 서지 못하는 때문에 당여들이 자기를 업신여긴다. 그런 때문에 태양인의 갑자기 노여워하는 것은 교우에 있지 않고 반드시 당여에 있는 것이다. 소음인의 기뻐함은 당여에 대하여 바르게 서기 때문에 당여가 자기를 도와주고 소음인의 노여움은 교우를 용감히 통솔하지 못하는 때문에 교우들이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다. 그런 때문에 소음인이 함부로 기뻐하는 것은 당여에 있지 않고 반드시 교우에 있는 것이다. 」

- 원 문 -

교우와 당여 역시 천시와 인륜 세회와 지방의 관계처럼 시이소오의 양편에 있어 자칫하면 쉽게 한쪽은 부부(부익부 부익부)되고 한쪽은 빈빈( 빈익빈 빈익빈 ) 될 수 있는 부빈(부익부 빈익빈)의 관계라 할 수 있다. 교우는 불특정의 다수를 상대하는 것이고 당여는 특정의 소수를 상대하는 것이며 교우는 가정이나, 거처나, 조직, 편, 모임 등을 고려치 않고 어떤 사람이건 그 사람과 관계하는 것을 말한다면 당여는 특정한 사람을 끌어들이고 편을 만들고 조직을 만들고 여러 명이 힘을 합치고 하는 것이다.

태양인은 섞생의 자세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을 노여워한다 하였고 소음인은 자신을 돕는 것을 기뻐한다 하였다. 물론 여기나오는 업신여김을 노여워하거나 돕는 것을 기뻐한다는 말은 우선 장부와 성정의 관계에서부터 보아야 한다. 심리적으로 태양인은 "노여움"의 자세로 세상을 대하고 소음인은 "기쁨"을 만들려는 자세로 세상을 대한다는 말도 될 수 있을 것이다. 태양인은 토론이나 대화라도 할 경우 반론이 나오면 벌써 "노여움"의 마음이 생겨 세상을 대한다는 말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노정(怒情)은 토론이나 대화라도 할 경우 반론이 나오면 벌써 "노여움"의 마음이 생겨 즉각적으로 되받아 치거나 심하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할 수도 있으나 희정은 이럴 경우 "기쁨"의 마음으로 어떡하면 논쟁을 피하거나 경쟁 격렬함의 상태를 피하고 의견을 서로 맞춰 끝낼 수 있는가를 모색할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자세나 장단점은 있다. 또 사상인 누구도 노여움이나 기쁨의 마음을 가질수 있다.

사회 속에서는 한 개인의 의견만 고집 하는 것도 또는 얼렁뚱땅 좋게 좋게 넘어가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고 또 어떤 때는 어떤 사람이 제시한 올바른 방향, 목표를 향해 스스로의 이해 관계를 떠나 참여해야 하기도 하고 여러 사람들과 의견을 조율 일치된 결론을 내리려 양보하고 타협해야 하기도 때문이다.

이 글은 이런 것도 말하고 있다.

노여움은 소양의 氣이고 기쁨은 태음의 氣이다. 이 글은 태양인의 소양의 氣에 대한 흐름과 소음인의 태음의 氣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다. 노정의 급함은 어쨌건 태양인에게 타상인에 비해 뛰어난, 우수한 특성을 만들어준다. 그러나 태음의 氣인 희기는 노기가 일으키는 ( 노정이 노기를 일으키기도 한다. 우리가 화를 낼 때 노정은 노기를 격하게 움직이게 한다. ) 노정으로 인해 계속 깎여나가는 "간"과도 관련되어져 있다. "간"이 약한 태양인은 "희기"도 안정되어 있지 않으며 이에 따라 희정에 대해서도 선천적으로 익숙하여져 있지가 않다. 이점에서 소음인은 "신"이 강한 사람들이지만 "간" 역시 희기가 급해져도 무리는 없다. 희기가 급해질수록 깎여나가는 것은 "비"이다. ( 이는 사회생활 속에서 희정이 급하게 일어나도 희기가 격하게 움직인다 ) "비"는 노여움의 장부이다 소음인은 선천적으로 노정에 대해선 익숙하지가 않는 것이다.

태양인의 "노여움"의 심리는 사람들을 대할 때도 꺼리낌없이 누구에게도 접근 서로 소통하게 하고 무리 속에서도 우뚝 나서서 자신의 의견을 주장 교우를 통솔하게 하여준다. 그러나 이렇게 교우를 통솔하려면 피차의 이해 관계를 떠나야 할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럴 때 당여 즉 같은 뜻, 이해관계 등을 갖고 있는 무리에도 "노여움"의 칼날을 들이대면 당여들은 그를 업신여길 것이다. 이것이 태양인의 "기쁨"이 당여에 대해 바르게 서지 못하는 많은 이유중 하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점에서 소음인은 태양인과는 상대적이다. 소음인은 자신이 속한 무리와의 여러 가지 관계를 잘 떠나지 않는다는 말도 된다. 항상 자신의 당여편에 서서 당여의 입장에서 당여를 챙기고 다독거려가며 일을 해도하고 교우를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또한 평소의 소음인의 행동도 격정적으로 상대를 압도 하려하거나 일마다 앞에 나서 주도적으로 하는 스타일이 아닌 이상 어쩌다 용감히 나서서 교우를 통솔하려해도 그에게 아무리 그런 능력이 있다해도 불특정의 다수는 - 즉 그를 잘 모르거나 그저 얼굴이나 알고있는 사이 - 그를 따라주지 않을 것이며 때론 그를 잘 아는 사람도 그가 용감히 나서는 행위를 하려 할 때는 잘 미더움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교우가 잘되면 함부로 기뻐하기도 하게 될 것이다.

역시 怒를 화가 나있거나 성나있는 것으로 喜를 기쁨으로만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원문에도 보면 怒精이니 怒性이니 하지 않고 怒와 喜라고 표현하였다. 怒는 공격적이거나 주도적으로 나서고 경쟁적이며 두려움이 없으며 직선적으로 내달리는 자세이다. 喜는 방어적이고 화해적이며 조심하고 물러서고 타협하고 이해하는 마음의 자세이다.

「 우리는 우리의 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또한 민중이 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며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안다.

실로 오십년전의 러시아 청년들보다 많은 것을 안다.

그러나 누구하나, 불끈 쥔 주먹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브 나로드!"라 외치며 나서는 자 없구나. 」

- 石川啄木 이시카와 다쿠보꾸 끝없는 토론 中 -

브 나로드는 민중 속으로란 구호로써 1870년대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바쿠닌이 제창하였다. 이 시인이 시속에서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怒의 자세를 가진 사람은 아닐까한다. 혼란과 무질서 혹은 많은 사람이 주저주저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앞으로 나서며 주도적인 행동을 보이거나 대중연설을 통해 그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하자 바로 그것이 怒의 자세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렇다고 그 사람이 단 한사람을 설득시키는 것도 능하다 할 수 있을까.

만 명을 설득하기보다 한 명을 설득하는 것이 어려운 경우는 없을까? 만 명을 전체적으로 단번에 설득하기보다는 한 명씩 한 명씩 열 명을 설득하고 그 열 명이 또 열 명씩을 이러한 자세로 만 명을 움직일 수도 있다. 바로 喜의 자세이다. 그런데 모든 일에 무리가 없고 원만하며 대인관계도 부드러운 사람이 있어 친구도 많고 조직 내에서도 인정받고 있다하자. 그렇다고 이 사람이 많은 사람 앞에서 많은 사람들과 언성을 높이기도 하며 자신의 생각하는 바와 의도하는 목표를 강력하게 밀어부칠수도 있을까?

"喜"에서 나오는 상냥함, 명랑함, 사랑스러움, 사근사근함, 나약함, 섬세함 등은 당여에서는 잘 통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그리고 교우에 있어서도 통할 수 있지만 교우를 용감히 통솔하지는 못한다. 진시황의 위엄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두려워했는지 그가 죽었을 때도 그의 죽음을 믿으려 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이러한 강한 카리스마와 성격을 가진 사람이 상냥하고 타협적이고 화해적이거나 사근사근하게 무리의 의견을 모아가며 당여를 하였을까? ( 물론 진시황도 그의 자식이나 좋아하는 사람이나 여자에게는 기쁨의 행위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위도 교우처럼 했을까? )

태양인을 드러내게 하는 것도 怒이고 가두어 버리는 것도 怒이며 소음인을 드러내게 하는 것도 喜이고 가두어 버리는 것도 喜인 것이라 말해도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소음인은 정치에 있어서는 우리 나라 같은 경우 소위 "밀실"정치에 재능이 잘 발휘된다. 한때 5.16의 실력자였고 현재도 크게 활동중인 K씨는 소음인이라 생각된다. K씨의 특징은 지식이 매우 많고 당여에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의 개인적인 설득에는 넘어가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다한다.

연개소문이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알아차리고 열병식을 이용 반대파들을 죽이고 그날로 영류왕까지 죽이고 난후 정권과 정세를 휘어잡는 과정은 하루도 안 걸렸다. 참으로 일사불란하고 신속하고 잔인하여 사태가 끝난 후에는 누구하나 입도 뻥긋하지 못하였었다. 아마 연개소문은 태양인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혹 소양인이었을 수도 있다. 하여간 양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