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양인의 슬퍼하는 것은 사무에 민첩하고 통달하는 때문에 사무는 자기를 속이지 않고 소양인의 즐거움은 거처에 항상 안정되어있지 않는 때문에 거처가 자기를 속이게 된다. 그런 때문에 소양인이 갑자기 슬퍼하는 것은 사무에 있지 않고 반드시 거처에 있는 것이다. 태음인의 즐거움은 항상 거처에 안정되어 있는 때문에 거처가 자기를 보호해주고 태음인의 슬픔은 사무를 민첩하게 통달하지 못하는 때문에 사무가 자기를 보호해주지 않는다. 그런 때문에 태음인이 함부로 즐거워하는 것은 거처에 있지 않고 반드시 사무에 있는 것이다. 」

- 원 문 -

사무와 거처의 관계 역시 시이소오의 양편과 같으며 부부, 빈빈 되기 쉬운 관계라 할 수 있다. 사무는 밖을 향한 것이고 거처는 안을 향한 것이다. 가정과 직장으로 치면 직장은 사무고 가정은 거처이다. 집으로 치면 사무는 집밖이고 거처는 집안이다. 직장으로 치면 사무는 일을 벌리는 것이고 거처는 그 기반을 다지는 것이다. 사업으로 치면 거처는 자기 사업체의 사람들의 문제를 잘 다스리거나 안정시키거나 잘 다루는 것이고 사무는 밖에 나가 새로운 일을 벌이거나 기존의 일을 성취시키기 위해 노력하거나 새로운 사태에 적응해 나가는 것이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은 거처의 자세이고 知人正己는 사무의 자세이기도 하다. 장부의 기능과 氣의 관계에서도 거처는 신과 사무는 폐와 관련이 있다.

태음인은 낙정이 급하다 이에 따라 낙기도 급해지며 낙기와 관련된 "신"도 급해지며 거처를 안정시키려는 심리도 급해지며 함부로 즐거워하게도 된다. 그리고 이때 낙정이 급할수록 폐가 깎이게되며 "애기"와 "애정"은 불안정해지며 계속 침체된다. "애기"는 우리몸속에서 계속 분열하며 힘과 열을 일으켜 활발한 정신과 몸의 상태를 만들어야 하는데 희기는 공급이 느리고 일정량의 애기가 필요한 신은 계속 끌어당겨야 하는데 애기는 모자라고 이에 따라 낙기는 급해지고 낙기가 급해질수록 계속 폐가 깎여나가고 있는 것이 태음인의 몸의 구조이다.

태음인의 사무에 빨리 통달하지 못하는 것은 애기의 부족 탓이고 이는 장점도 단점도 아니고 장점이 될 수도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평가는 물론 결과적인 현상을 두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양인은 애정이 급하다 이에 따라 애기 역시 급해지며 애기와 관련된 폐도 급해지며 사무에 민첩하고 통달하려는 심리도 급해진다. 그리고 갑자기 슬퍼하게도 된다.

애정이 급할수록 "신"은 활발히 그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데 비가 강한 소양인의 "신"은 늘 "비"에 힘을 빼앗기고 있는 통에 무리를 하며 애기의 부산물을 가져오게 된다. "애정"이 급할수록 "신"이 깎여나가는 이유이다. 신이 깍여나갈수록 "낙기" 역시 안정될 수 없다. 소양인의 즐거움이 거처에 안정되어 있지 않은 까닭도 이 때문이다.

소양인은 속으로야 어떻건 간에 빠르게 알아내고 적응하고 대응해 나간다. 그러나 태음인은 적응, 대응의 능력이나 자세야 어떤지는 몰라도 하여간 좀 느리고 원래의 관념이나 원칙, 습관을 잘 바꾸지 못한다. 소양인은 순발력이 좋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하는데 재주가 많다. - 물론 어떤 인간이든 스스로가 알게 모르게 persona를 하고 있다. 인간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받고 성장배경, 환경, 문화, 상황, 경험, 지식, 등에 따라 타상인의 특성을 발휘할 수 있다. 단 평균적인 "이오"에는 미치지 못한다.

소양인의 哀는 쉽게 불만을 느끼고 자꾸만 회의가 일어나는 것도 포함된다. 가령 어떤 과제가 앞에 있을 때 자꾸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거나 그 과제에 대한 매듭이 풀리지 않아 계속 의문을 느끼고 그 일만을 계속 파고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될 때 사무에 빨리 통달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태음인의 樂은 그런 대로 만족하고 회의를 억누르는 것이라 하겠다.

태음인이라고 불만이 없거나 비관, 슬픔, 회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마음이 생겨도 태음인은 잘 인내하고 다른 방법으로라도 잘 풀어낸다는 것이다. 이는 희성이 넓고 낙정이 급해서 일수도 있다. 또한 실용적인 자세가 많아서 이기도하다.

이런 가정을 해보자 옛날 궁중에서 한 대신이 모함을 받고 낙향해 있거나 귀양을 가 있다하자 哀가 강해지면 비관하고 체념하다 분노하고 그러다 세상을 조롱하고 비판하고 한을 품고 독을 품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좌절에 빠져 술로 인생을 망치거나 혹 절치부심 이를 극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樂이 강해지면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나름대로의 즐거움을 찾아 자연을 벗 삼거나 낚시나 즐기며 다시 중용될 날을 천연덕스레 기다릴 것이다.

독자는 어느 편이 더 강한 인간이라 할 것인가? 哀의 자세인가 樂의 자세인가?

산마을에 머물며 ( 宿山村 )

                  김시습

      개이는 비속에 온산은 저물고

      푸른 나무 사이에선 연기가 나네

      계곡에 걸린 다리는 구름속에 둥둥 떠있고

      들길을 따라 풀이 수북하네

      세상일은 기댈수조차 없이 흐리고

      사람들은 살아가며 스스로 풀어야 하니

      어떻소 티끌같은 이몸의 자취를 떨쳐버리고

      크게 휘파람이나 불며 깊은 산중의 숲속에 누워 있는 것이

 

강 설 (江 雪)

                유종원 (柳宗元)

      산에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길에는 사람 자취 끊어졌다.

      외로운 배에 탄 삿갓 쓴 늙은이가

      혼자서 낚시질 하는데 강에는 눈이 내린다.

어떤가?

지은이의 성품이 느껴지지 않는가?

태, 소음양인의 성정에서 비롯된 여러 특징들은 천성이며 천품이다. 무리하여 고치려하거나 감추려하다가는 병이 생기게 될 것이다. 소양인은 哀를 잘 느끼지만 또 哀를 잘 극복하기도 한다. 보기에 따라 믿을 수 없거나 변덕이 죽끊듯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태음인은 낙(樂)을 잘 느끼지만 또 樂에 쉽게 빠져버리기도 한다. 보기에 따라 믿을 수 없거나 노는 것만 좋아하는 인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거처의 특히 가정의 안정은 가정이 화목하고 부모와 자식에도 불화가 없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다른 면도 많다. 가령 집에 돌아가기 싫어하고 여러 가지 다른 일로 밖을 떠도는 일도 거처의 불안정이다. 자꾸만 새로운 일을 벌이려 하고 집에 있으면 답답해 죽겠는 것도 거처의 불안정이다.

소양인은 사무에서의 슬픔은 쉽게 잊을 수 있지만 거처에서의 슬픔은 지속적이다. 물론 모든 소양인이 이런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모든 태음인이 거처에 있어 화목하다는 것도 아니다. 태음인 소음인에게도 사회적으로는 뛰어난 일과 업적을 많이 남겼으면서도 가정적으로는 불안정한 사람이 많이 있다. 거처의 불안정이다.

연개소문은 거처를 안정시키지 못한 사람이다. 그의 사후 곧 형제간의 싸움이 일어난 것도 거처에서의 문제이다. 이러한 것은 고려 조선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고구려가 내부적으로 늘 소란했던 것도 거처의 문제이다. 이런 점에서 태음인은 일단은 거처를 안정시키고 나서 밖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대체적인) 태음인은 이러하지만 문화에 따라 다른 경우는 많이 있을 것이다.

가령 거처의 안정은 태음문화에선 "모든"쪽으로 비율이 좀더 높아지고 "소양"문화에선 "대체적인"의 사람들이 그러할 것이다. 거처의 안정은 집에 잘 들어간다고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거처의 안정은 그 거처가 행복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즉 태음인이 거처에 안정되어 있다는 것이 모든 태음인 부부는 혹 대체적인 태음인 부부는 행복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부부간의 행복은 두 사람이 만드는 것이지 둘이 꼭 붙어 있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란 동물은 대개 서로 같이 있게 되면 갈등이 있기 때문이다. 거처의 안정후 밖으로 나가려는 근사(近思)적인 생각 때문에라도 태음인은 대체로 밖의 일 즉 사무는 소양인에 비해 늦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해보자. 당신은 오늘 아니면 단기간내에 당신이 생각하던 모든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그 일이 끝나면 당신의 일은 끝나는 것일까. 오늘 하여야 하는 일 오늘 다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내일도 계속하여도 되는 일은 있는 것이다. 오늘밤을 새워 일하면 내일은 쉬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 알맞게 일하면 내일 역시 알맞게 일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면모가 많아서인지 태음인은 대체로 서둘지 않는다. 물론 항상 느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태음형의 문화에선 "느림"이 당연한 문화현상이 될 것이다.

실제와 실용은 양인과 음인의 특징이라 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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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양인이라 해서 모두 실제적이고 음인이라 해서 모두 실용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첫째, 양인도 실용적인 면은 51 : 49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49까지는 하고 음인도 실제적인 행동을 최대로는 49까지 하기 때문이다. 어느 행동이 나타날지는 모른다.

둘째, 네 기호가 象을 나타내려 할 때는 깊게 들어갈수록 두얼굴을 가진 기호가 발생시키는 의미들은 계속 구별시키고 반론을 제거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양인에게도 실용적인 면이 음인에게도 실제적인 면이 있는 것이고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양인이 더 실용적인 자세가 나올 수도 음인이 더 실제적일 수도 있고 아니면 가끔 그런 면이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서로간에 혼재되어있고 실제와 실용은 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고 구별은 시켰지만 하나로써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구별하자면 대체로 51 : 49 정도로 어느 하나의 특성이 더 많다 생각할 수 있다. 혼란스럽겠지만 그렇게 알고 출발하는 것이 나중에는 혼란이 적다. 모든 일을 바둑판처럼 정리할 수 있다면 필자는 사람이 아니라 신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신은커녕 천재도 수재도 못되고 평범한 범재일 뿐이다.

태음인의 슬픔이 사무에 빨리 통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란 것은 간기가 즉 느리게 풀어주는 氣가 강해서이다. 또한 실제적인 면이 부족하거나 빠르지 못하거나 적극적이지 못해서일 것이다. 일단 마라톤의 출발선 위에 서 있으면 다음엔 열심히 뛰는 것이 남는다. 뜀뛰는 도중 내가 갈 길을 누가 막으면 일단은 비켜가건 넘어가건 지나가면 되는 것이다. 내가 몽둥이로 내리칠 때 적이 몽둥이로 막으면 더 힘을 기르던가 강철로 된 칼을 만들고 적이 총을 사용하면 이쪽은 대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상이 실제적인 사고인 것이다. 태음인에게 이런 면이 없는 게 아니다. 다만 최대로 51 : 49 정도로 실용적인 면이 많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하나 혹 조금더의 차이가 많은 차이를 이끌어 내는 것이며 눈에 띄는 특징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실용은 적이 몽둥이로 막으면 기술적으로 피해 치고 총을 쏘아도 사격술 훈련을 맹렬히 연습한 후 쏘는 것이다.

마치 곰처럼 태음인은 느리지만 매우 끈기가 있다. 필자는 한웅이 택한 웅녀는 아마 음인이었을 것이고 음인 중에서도 태음인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소음인이었을 수도 있다. 하여간 음인이다. 한웅신화는 양인들에게 음인의 특성을 좀 가지라는 교훈도 있다.

대기업의 사장 중에 태음인이 많다 하지만 천하에 둘도 없는 게으름뱅이도 태음인에 많다고 한다. 소양인은 부지런하지만 천하에 둘도 없는 망나니도 소양인에게 많을 것이다. 그가 어떤 생활속에 살아왔고 혹 살고 있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냐가 중요할 것이다.

관념의 방향 :

"권태"라는 단어가 갖고있는 개념이 우리의 피부에 와 닿기 시작한 것은 아마 먹고 살만하게 된 이후일 것같다. 물론 이상의 "날개"에 나오는 인물처럼 권태는 하는 일이 없으면 저절로 생기며 스스로가 그런 생활의 구조를 만들기도 한다. 가끔 아니 자주 독자는 정말 "심심"할 때 무엇을 하는가? 아무것에도 흥미를 느끼지도 않을 때 무엇을 하는가? 당장은 살아있기에 무언가 느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희망도 절망도 무의미하다면 무엇을 느낄까? 이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

당신이 "권태"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를 모르고 있었다면 당신은 지루하고 따분함 정도나 느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시기 그 따분함이란 것이 "권태"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 이후는 "권태"에 의해 이룩되고 창조되고 발달된 여러 가지 "기호"를 통해 당신은 시나브로 "권태"속으로 빠져들어 갈 것이다. 당신은 권태를 통해 생각하고 권태를 통해 판단할 것이다. 필자의 지나친 상상일까.

당신은 지금 이분법적이거나 변증법적으로 유물론적인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분명 인간이 기호를 만들었다. 기호가 처음 만들어지던 시기 인간들은 신나게 기호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기호는 인간들의 관념을 발전시키고 다시 인간들은 발달된 관념으로 다시 기호들을 만들고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늘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손짓 발짓으로 서로의 의사를 표현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때는 언어를 머리 속으로 읽어가며 이미지나 손짓, 발짓을 이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직관이라는 단어가 가진 개념으로 서로의 의사를 소통하였을 것이다. 직관을 사용할수록 인간은 직관 속에 빠져 들어갔을 것이다. 아마 기호가 전혀 없이도 서로간에 의사소통이 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호를 사용하며 이번엔 기호에 빠져들어 갔을 것이다. 그러면서 직관의 능력은 점차 잃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인간의 관념은 무언가를 지향하고 있었을 것이다. 별말 아니었다. 인간의 관념은 인간의 육체가 자동적으로 살아있음을 지향하는 것처럼 늘 무언가를 향하고 있음을 말하려 하였다.

도대체 인간의 관념은 저마다 무엇을 지향하고 있을까. 인간은 그 자신의 관념의 지향하는 바를 향해 여러 가지 기호들을 뜯어 맞추고 수정하고 회의하고 다시 맞추고 행위하고 자신의 모순에 갈등을 겪다가 스스로의 틀 속에 빠져 버리기도 스스로의 틀을 굳건히 만들기도 할 것이며 그도 저도 모른 채 일생을 보내기도 할 것이다.

관념의 방향은 자신의 틀을 형성시킨다. 만물제동이니 화두니 사랑이니 자비니 하는 기호들은 바로 관념의 방향에서 만들어진 글들이다. 그러기에 관념의 방향은 바로 "기호"로 요약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호는 그 특성상 서로 구별되는 것일 뿐이다. 이 책에 쓰인 기호에 얽매인다면 사상인이 이 책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이 책이 사상인을 만들게 될 것이다.

당신의 "관념의 방향"이 기호에 얽매인다면 당신의 생각은 영원히 수많은 기호중 하나의 기호일 것이다. 그것은 화두도 아니고 하나의 패러다임이나 테마일 뿐이다. 그리고 당신은 정말 영원히 상대적인 하나일 수밖에 없는 기호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