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마가 격치고라는 책까지 써가며 사상의학에 유교적인 사상을 집어넣으려 한 것은 다른 뜻도 있을 법하다.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동의수세보원의 내용은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도 발전될 수 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해 이용한다. 어떠한 숭고한 종교와 사상도 인간 앞에서는 수단이되고 도구화 되어왔다. 인간은 종교적인 선을 위하여 인륜적인 선은 때로 무시한다. 인간은 인륜적인 선의 무시를 종교적인 선으로 합리화시키기도 한다.

동의수세보원에 나오는 사상인에 대해 인간들이 숙지하게 될 때 역시 좋은 현상만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 선하게 살아야한다. ' 라는 칸트식의 정언적 명령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말일 뿐이다. 인간들이 모여사는 사회속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규제하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책임지지 않는 한 사상의학 역시 악용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마는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상 즉 인류차원에서의 공통적인 구심점을 찾고자 했던 것 같다. 이제마는 이를 유학의 사상 특히 맹자의 " 성선설 " 에서 이끌어 내려 하였던 것 같다. 이제마의 中一은 ' 선 ' 인 것이다. 선한 마음인 것이다. 모든 인간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마음은 인간의 사고와 감정과 행동을 규제한다. 인간의 마음이 정확히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냐 악하냐를 놓고 맹자와 고자간에도 논쟁이 오갔고, 순자는 인간의 성은 악하기에 성인의 가르침을 통해 선으로 이끌어야 한다 하였었다. 유학은 송대에 이르러 정자와 주희에 의해 주자학 또는 정주학으로 집대성되며, 고려와 조선으로 수입되어졌다. 조선중기 이후 "성정의 문제" 를 놓고 이황과 기대승. 이이와 성혼간의 철학적 논쟁을 거치면서 人性에 관한 논쟁이 뜨겁게 전개되어졌었다. 조선시대 인성논쟁의 특색은 "성은 선하다" 는 이미 확고불변의 진리였으며, 이러한 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성정론 외에 우주론의 의미인 理氣론이 성정론에 가세되어지며, 타고난 본성이 理냐 지금의 마음이 理냐를 놓고 철학적 논쟁이 벌어졌었다.

性은 理라고 하는 것은 주자학에서 하는 말이고 주희와 동시대의 인물인 육상산이나 후대의 왕양명등은 心을 理라고 하였고 이들의 학문을 후에 양명학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유학자들간의 논쟁은 중국학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은 사실이지만 풍습과 생각이 다른바 그들과는 다르게 전개되어 나갔다. 그러나 心을 우선시하는 양명학은 주자의 학문에 가려 조선에서는 크게 발전되지 못하였다. 조선에서는 서경덕이나 허균 등이 心을 중요시하였다 할 것이다. 중국의 학자들이 性은 선하지만 心은 惡에 기울수도 있다는 다소 유동적이고 모호하지만 숨통을 터주며 전개되어 나갔던 반면 조선시대의 학자들은 인간의 마음은 절대 선하다는 진리 하에 악에 기울게되는 원인과 악으로 흐르는 마음을 바로잡아 선하게 돌려놓아야 한다는 당연한 말같지만 바늘하나 꽂을 틈도 없는 엄격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조선 후기에는 실학적인 영향도 있었고 공리공론과 파당짓기를 일삼는 유학자들에 대해 비판과 반성의 분위기도 있었다. 이제마가 이런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는지 안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후기의 실학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제마는 나름대로 유학을 간추려 보려하기도 하였고 그 간추려낸 생각을 사상의학에 접목시키려 하였던 것 같다. 이제마는 성은 선하다는 전제하에 현실에서는 心을 性보다 우선시하였다.

성정과 心에 관한 논쟁은 조선중기 이후에도 계속되어 나갔지만 이황,기고봉,이이 성혼등이 세운 心·性·情 논리의 틀을 크게 벗어나진 못하였다. 맹자의 성선과 심·성·정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였었다. 모든 논쟁이 그렇지만 논쟁에는 항상 상대가 있는 법이다. 특히 형이상학적인 논쟁은 상대가 있기에 한참 간 것 같은데 돌아보면 제자리인 경우가 많다.아마 이럴 때 이질적인 문화와의 접촉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이제마는 인간의 타고난 성은 선하다는 전제 속에서 어떻게 하면 心을 조절, 성을 타고난 그대로 완성하여 올바른 행위를 하게 할 수 있을까하는 쪽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개시켜 나가려 한 듯 생각된다. 인간의 마음, 결국에는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활용하기에 따라 사상의학 - 이하 사상론 - 은 개인의 심성조절 뿐아니라 산업체의 인력배치에도 회사의 경영계획에도 적용될 수 있다. 어떤 나라 또는 자기나라 지역의 풍습이나 문화를 이해하는데도 활용되어질 수 있고, 자기지역이나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을 선발할 때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연구소의 인적구성이나 공장의 생산라인의 인원배치에도 적용되어 질 수 있다. 개인사업을 하는 사람에게도 기업체의 각종 부서나 국가의 제도와 기구를 만들거나 축소시키는 것 등에도 활용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스스로의 신체적·심성적 사고행위에 있어서의 장단점을 알고 현상에 임해 나아갈 수 있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여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사상학의 잣대로만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속담에 '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모른다 ' 했다. 인간은 공격받을때는 누구나 저항하게 되며 생존과 이해관계 속에서 자기의 약점이 되는 모습을 끝없이 바꾸어 나간다. 이것이 易이기도 하다. 이 책대로 다른 사람까지 구속하려 들다가는 결국 언젠가는 자기가 파놓은 구덩이에 자기가 빠지는 어리석음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하여간 이책을 다 읽고나면 다른 사람까지는 몰라도 자기 자신정도는 어떤 사람이란 것에 대해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된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사상학 역시 개인의 차원에선 즉각적으로 연역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연역된 결과가 인간들 서로를 더욱 이용하고 질시하게 만든다면 이 책을 쓴 의도에서 가장 벗어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러한 흐름은 수백 수천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인간들 서로가 스스로 어느 정도의 수준을 갖추고 서로를 견제할 때 부정적인 작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제마는 이러한 부작용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유학의 가르침에서 그 해결책을 찾아 스스로 책심하는 방법에서 찾았으리라 생각된다.

" 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는 그 마음을 책망하는 것이다. 마음의 본체는 밝고 어두운 것이 비록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 같지만 마음을 책망하는 자는 맑아지고 책망하지 않는 자는 흐려지는 것이다. "

- 이제마 성명론 中 -

인간은 책심을 하더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으로 자기가 알고있는 기호들을 가지고 판단하고 책심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행위는 곧 자신이 아는 기호로써 논리화되고, 기호는 가장 극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인간의 사고행위는 극단을 통해 이루어지고 나타난다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진리 역시 기호로 이루어져있고, 극의 논리이다. 그리고 그 극의 논리를 이끌어낸 기호는 단지 수많은 기호 중 하나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