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에 나오는 '김첨지'는 상당히 희극적인 인물이다.

현진건은 이 희극적인 인물을 통해 역설적으로 비극적인 소설을 썼다. 희극적 서술과 비극적 끝맺음을 통해 배따라기 같은 페이소스를 이끌어내고 있다.

김첨지는 인력거 꾼이다. 어느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몇일을 허탕친 끝에 손님을 맞게 되니 뛸듯이 기뻤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운이 좋아 계속 손님을 태우게 되었다. 그날만은 나가지 말아달라는, 일찍 설렁탕이나 한 그릇 사들고 들어와 달라는 아내의 말도 잊은채 신이나서 저녁때까지 뛰어다니고 꽤 많은 수입을 올리게 된다. 이쯤되면 집에 돌아갈만도 한데, 그는 계속 정신이 없다. 외려 그는 손님을 태우고 가다 우연히 집근처를 지나게 되었는데 집이 가까워 올수록 발길이 무거워지고 멀어지면서는 다시 발길이 가벼워진다. 혹 현진건 자신의 심리가 이렇진 않았을까? 아니더라도 그는 언젠가 인력서 꾼에게서 주워들은 이야기에서 동기를(소재를) 얻어 왔는지도 모른다. 김첨지는 일이 끝나고도 집에 돌아가야 하는 마음 -그의 아내는 매우 아파서 누워있고 세살배기 아이도 있으므로 빨리 집에 가봐야 한다.- 보다는 어디가서 한잔하고 싶은 생각이 더 간절하다.

결국 친구를 만나게 되고 친구가 빨리 집에 가보라는 말도 무시하고 그와 술집으로 간다. 기분이 좋아지자 아내가 이미 죽었다는둥 하며 괜히 눈물을 찔끔 거리다가 다시 해해 하고 웃으며 안죽었다하는둥 횡설수설 한다. 건하게 취한 다음에야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고 아침에 나올때 들었던 말도 생각난다. 아내가 먹고 싶다던 설렁탕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아내는 이미 죽어 있었다.

김첨지는 소양형의 인물이다. 물론 보기에 따라 음형의 인물로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소양형의 인물이지 소양인은 아닌것이다. 현진건의 빈처란 작품까지 생각해 보면 현진건이 소양인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든 소설이든 자기가 아는 기호들을 가지고 자기의 마음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소양인들이 모두 가정적이지도 않고 아내를 사랑하지도 않는다는게 아니다. 그런것은 그 사람의 관념이 어떠하냐가 문제이다. 남자가 허구헌날 집안에만 있는다고 남녀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너무 양형의 인물들만 나오는데 우리나라 소설상의 주인공중에 그런 사람이 많다. 그러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들의 주인공 "나"는 음형의 인물이다. 날개의 "나"도 손창섭의 비오는 날의 "원구"도 음형의 인물이다. 물론 이 소설들의 내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들이 음인이라는 것은 아니다. 게다적 개념의 말들이다.

국가에 따라 문화에 따라 또 시대에 따라 음양형의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다르다. 마치 어떤 때는 '이정재'스타일이 선호되었다. 어떤때는 '배용준'스타일이 선호되듯이 말이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라는 영국소설에서는 소양형의 인물에 대해 경솔하고 흥분하기만 잘한다고 혹평을 한다. 모파상의 소설에 보면 바람둥이에다 속내가 엷고 때론 다혈질의 인물로 그려 놓고 있다.

노신의 '아Q 정전'속의 아Q,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속의 시마무라,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중 베르테르 등은 모두 음형 인물들이고 헤세의 데미안에서의 싱클레어 좁은문의 '제롬'등도 음형 성격의 인물이다.

우리나라의 소설중 주요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중의 사랑방 손님도 음형 인물이다.

이글은 글쓴이 부터 말하고 싶다.

필체는 간결하고 깔끔하고 산뜻하다. -물론 필자의 느낌이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와의 관계도 독자의 상상에 맡기고 구체적인 묘사를 꺼리고 있다. 어쩌면 주요섭 자신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시원스레 말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그럴수도 있다. 그러나 양인중에도 시원스레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는 사람은 많다. 왜그럴까? 그것은 그 사람의 지나온 환경으로 볼 수 있다. 교육을 그리 받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그 사람은 과거 말을 함부로 막했다가 봉변을 당한 경우가 많았을 수도 있다.

옥희 몰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간에 모종의 연락이 오고가긴 한것같은데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는 없다. 다만 짐작을 할 수 있다. 주요섭은 그런 구도를 만들기 위해 신경을 냵을지도 모른다. 소설속의 어머니도 손님도 모두 음형 성격을 보이고 있다. 어느쪽이더라도 양인이 있었다면 먼저 말이라도 붙였을 것이다. 아니 음인들이라고 먼저 말을 못 붙인다는 보장도 없다. 그런 모습은 50중에서 '하나'의 모습이고 나머지 49는 어떠할지 모른다. 그당시의 관습상 여자는 그러기가 힘들었을까...

김시습의 금오신화를 보면 여자라도 무척 적극적이다.

옥희어머니의 성격은 유교문화가 또 남자들이 그러기를 강요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여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할 수는 없다.

앞집처녀 시집갈때

뒷집총각 목매러간다.

- 원주 아리랑중 -

양반집 규수들이 비교적 유교식 예의범절에 구속되어져 있었다 하면 일반 서민층의 여자들은 그래도 좀 자유스러웠을 것이다. 불꽃을 가지고 마음을 주고 울지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는 사람은 여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옥희 어머니는 아직도 여자는 다소곳 해야 한다느니 여자는 애프터를 먼저하지 않는것이 낫다느니 하는 남자들의 선입견(이건 여자들 스스로의 편견)이 있으니 그렇다 치자. 사랑방 손님은 음인의 인물이다. 결국 말한마디 제대로 못 붙이고 옥희 어머니의 이젠 달걀 안 산다는 목소리처럼 맥없이 소설은 끝난다.

"음"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소설에는 이효석의 메밀꽃필 무렵이 있다.

장에서 장으로 옮겨다니는 길의 산과 들이 그대로 고향이 되어버린 허생원의 어느 하룻밤의 이야기를 통해 한 장돌뱅이의 삶이 한편의 활동 사진처럼 그려져 있는 소설이다.

이효석은 초창기에는 현실고발의 리얼리즘적 색채를 띠었으나 1933년 이후에는 서정적이고 토착적인 자연주의와 탐미적인 경향을 보였다. 외유내강의 성격으로 옷차림은 단정했으며 주량은 두주불사였다 한다. 이로보건데 그는 음인으로 생각된다.

허생원은 강원도 봉평. 제천 등지의 장터를 떠돌아 다니는 장돌뱅이 이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장에서 만난 동이와 조선달과 함께 봉평에서 대화로 밤길을 넘어가게 되었다. 허생원은 젊은 시절에는 돈도 좀 벌었으나 몇일동안 진창놀고 투전하고 하며 다 털려버리고 다시 장에서 장으로 떠도는 터였다.

평생을 여자와는 인연이 먼 그였으나 단한번 20년전 봉평에서 한여자와 인연을 맺은적이 있다. 무더운 어느날밤 목욕하러 나왔다 우연히 만난 한 여자와 정분을 맺게 된다. 남의집 규수를 범한게 겁이난 그는 다음날로 도망을 쳤다. 그후 다음 장날에는 다시 찾아보았지만 여자네 가족은 어디론가 떠난 뒤였다. 그는 그 여자와의 그 인연을 가슴속에 두고 추억하며 살아오던 터였다.

오늘밤도 산을 넘어가며 조선달과 동이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이어서 동이가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한다. 동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허생원은 그날밤의 그 처녀가 동이의 어머니임을 알게 된다. 극적인 상황이 없어서 인지 주인공들의 성격은 잘 드러나 있지 않다. 필자가 생각하는 허생원의 성격은 '음형'의 성격이다 그러나 소양인도 이러할 수 있다. 매사 맺고 끊내고가 빠른 편이지만 그러다가는 이 '허생원'처럼 질질 끌고 잊지 못하기도 할 수 있다. 이점 소음인은 매사를 잘 맺고 끊지 않으나 태음인도 경우에 따라서는 차갑게 끊고 돌아서서 깨끗히 단념하는 성격이다. 그때그때의 상황과 정도의 차이와 생각하는 바가 무엇이냐가 문제이다.

이 작품도 소설속의 인물보다는 작가에 관심이 간다.

문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굴곡이 없고 평이하고 담담히 써 놓았다. 시적인 분위기에 간결하면서도 여름날 계곡물에 발을 담근 듯한 서늘함과 애잔한 추억같은 아쉬움이 계속이어져 간다.

결말부분에서 동이와 맞잡고 울음을 터뜨렸다면 오히려 이러한 분위기가 깨어졌겠지만 시원스레 동이와의 관계를 밝히고 있지는 않다. 암시만 줄뿐이다. 이효석이 음인 이었을수도 또는 의도적으로 소설기법상 여운을 남기기 위해 그리 하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태 소음양인은 식견 또는 재국에 있어 각각 장점이 있고 또 문필, 신체적 재능 가무 읍양으로부터 박혁의 잔재주와 세소한 동작에 이르기 까지 모든일에 있어 면면히 서로 같지 아니하며 묘리를 달리하고 있으니 많은 사람들의 넓고도 다양한 재능이 조화속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 원문 -

책의 처음에 쓴 이글을 다시한번 쓰게 되었다.

이제는 독자도 이글을 어느정도나마 이해할 줄로 생각한다.

지구상의 인구는 50억이 넘는다. 개별적으로 따지자면 이 50억명은 50억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된다. 그렇다고 하나의 절대적인 보편으로써 50억 아니 그 이하라도 좋다. 한명의 인간이라도 하나로써 일관되게 설명할 수는 없다.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며,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된다는 논리의 모순속에서 필자는 대원과 태극과 음양과 사상을 말하였다. 대원은 평면적으로 대원이고 입체적으로 하자면 큰공이다.

 

대원은 큰공을 큰울로써 그린것이다.

큰울은 하늘이고 우주를 말하는 것이 된다.

사실 막연한 하늘에 끝이 있을 수 없다.

당신이 끝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다다르면 그곳이 다시 시작점이 되는 것이 우주이다.

이러한 우주를 --과 --라는 두기호로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 음양 사상이다. 음양은 다시 사상과 팡괘 64괘까지 발전되고 이책에서는 그저 4상까지만 다루었다. 누군가가 8상 16상 32상, 그리고 64상가지 발전시켜 주었으면 좋겠다. (주역식이 아닌 순수한 易으로 말이다. 易의 르네상스를 말한다. 인체는 소우주라고 말하여 왔지만 실제 인체의 운동뿐아니라 인간자체를 음양과 사상으로 구별지어 놓은 것은 독창적인 일이었다. 이점에서 이제마는 동양의학에서는 신농씨 이래의 최고의 천재라고 생각한다.

「 <영추경>속에 태 소 음양 오행인론이 있긴하나 간략하게 외형을 얻었을뿐 장부의 이치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대개 태 소음양인에 대한 견해는 일찍부터 나타났으나 아직도 정밀한 연구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 」

- 원문 -

사상인의 개인별 특징은 이제마 선생이 그 근본을 밝혀 놓았고 이어 많은 사람들이 그 특징을 더욱 자세히 밝혀 놓았으나 항상 그렇듯 계속더 밝혀가야 할 것이다.

또한 수정시킬 것은 수정시키고 새로 밝힐것은 새로 밝혀야 할것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현상에 있어서 그시대 사람들이 하여야 할 일들이다. 본질은 변함없건만 현상은 계속 변화를 겪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현실은 현상속에 있기 때문이다. 레비 스트로쓰는 기준을 무한정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계열들을 무한정 세우게 만들것이라 했다. 현상에 있어서 현상만을 보고 기준을 세우자면 이와 같을 것이고 또 현상은 무한정의 질서를 세울 수 있어 어느시대건 그시대 사람들은 그 시대의 질서를 세워야 하고 새로운 질서와 기준이 설때까지 사람들은 혼란을 겪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본질을 모른다면 오늘 자본주의 가치관이 내일은 공산주의 가치관으로 바뀔수도 있고 다시 제국주의 왕조주의 가치관이 기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점에서 사상의학은 의학뿐 아니라 자연계의 구조 인간세계의 구조까지 말하고 있다. 이것이 기(氣)라면 기(氣)이고 易이라면 易이며 태극이라면 태극이다. 이책의 내용이 우리 인간들이 질서를 재편하거나 다시 세우거나 기존의 질서를 보완할때 이(理)를 찾고 중일(中一)을 만들어내는데 큰 도움을 주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