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인이 소변이 많으면 몸이 튼튼하고 병이 없는 것이요 태음인이 땀이 시원스럽게 나오면 몸이 튼튼하고 병이 없는 것이요. 소양인이 대변이 잘 통하면 몸이 튼튼하고 병이 없는 것이요. 소음인이 음식이 잘 소화되면 몸이 튼튼하고 병이 없는 것이다. 」

- 원문 -

  태음인은 몸이 찌뿌둥하면 사우나에서 땀을 흠뻑 빼라.  운동으로 땀을 낸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양인은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은 대 소변의 불편을 겪을 것이다. 단 튼튼한 젊은날은 제외이다. 소음인은 대체로 몸이 불편할때 입맛부터 떨어질 것이다.

「태양인이 열격증(열膈證 ; 목이 메어 음식물을 잘 넘기지 못하거나 먹은 후 얼마 있다 토해내는 증상)이 있으면 위완의 상초가 열려서 마치 바람이 나오는 것같이 되고, 태음인이 이질에 걸리면 소장의 중초가 막혀서 마치 안개낌 것 같이 된다. 소양인이 대변이 불통되면 가슴이 뜨거운 불덩어리 처럼 되고 소음인이 설사가 그치지 않으면 배꼽밑이 반드시 얼음처럼 차가와 진다.」

「내가 보충해서 말한다. 태음인은 항상 밖을 살펴서 겁내는 마음을 가라 앉혀야 하고 소양인은 항상 안을 살펴서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라 앉혀야 하고 태양인은 항상 한걸은 물러서서 급박한 마음을 가라 앉혀야 하고 소음인은 항상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서 불안정한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 이와 같이 한다면 반드시 수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 원문 -

균형잡힌 사고와 행동을 하기 위해서도 행복한 인생을 위해서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성격의 특성속에만 갇혀 있어서도 안될 것이다. 극단으로 자기 성격위주면 음인들은 우물안 개구리가 되기 쉽상이고 양인들은 플란다스의 개 같은 신세가 될 것이다.

「신라 마지막왕은 경순왕(敬順王)이다. 경순왕의 아버지는 경애왕으로써 이때이미 신라의 국세는 기울어져 있었다. 그당시 견훤은 강성한 세력을 가지고 있어 신라의 서울까지 자주 침범을 하였었다. 그런데도 경애왕은 왕건에 도움을 청해 놓고는 잔치를 벌이고 놀이나 즐기고 있었다. 927년 11월에 왕건을 공격하러가다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견훤은 대대적으로 신라의 서울까지 쳐들어 왔다. 이때 경애왕은 비빈과 종친 및 외척들과 함께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이고 놀고 있었기 때문에 적병의 내습을 알지 못하였다가 매우 위급한 지경에 빠져 허둥거렸다. 왕과 비빈은 후궁으로 도망해 들어가고 종친과 외척대신들은 도망쳐 다니다 사로잡혀 노비가 되기를 엎드려 빌었었다. 견훤은 재물을 약탈한후 왕궁으로 들어가 자리잡고서 부하들에세 경애왕을 잡아 들이라 했다. 부하들은 후궁에 숨어있는 경애왕과 왕비 비첩들을 찾아내어 군중들 앞에 끌어내어 왕은 자살하게 하고 왕비는 강제로 욕을 보였으며 빈첩들 역시 전부 욕을 보여 놓고는 경순왕을 왕으로 앉힌후 돌아갔다.」

- <삼국유사> 中 요약 -

신라로선 치욕적인 일일것이다. 견훤은 소양인이라 생각이 된다. 견훤은 그 성격이 호전적이고 잔인하고 용맹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경애왕의 비극은 그 선대 김춘추와 김법민이 백제인들에게 행한 행위를 근 300년뒤에 돌려받은 것이다 .백제가 망하고 사로잡힌 의자왕에게 김법민은 침을 뱉고 발로차며 땅바닥에 이리저리 뒹굴렸다 한다. 이렇게 된 원인을 따지자면 끝이 없지만 한번 직접적인 원인만 따져보겠다. 의자왕이 이렇게 수모를 당한것은 성충의 아우 윤충이 김춘추의 딸과 사위를 속임수로 죽인데에도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의자왕 재위시 부여윤충은 김춘춘의 사위 김품석과 딸 소랑(炤랑)이 다스리는 성을 포위하였었다. 김춘추는 딸 소랑을 매우 사랑스러워 했다고 한다. 그래서 큰 땅을 주고 다스리게 하였었다. 무왕이 죽고 의자왕이 즉위하는 틈을 타 김유신이 계백이 지키고 있던 가잠성(假岑城 ; 지금의 괴산)을 공격하는 사이 백제는 성충의 계략대로 가잠성은 명장 계백에게 맡기고 대야성(大耶城)을 기습하여 신라의 허를 찔렀다. 이때 대야성주는 김품석이었다. 김품석에 대해서는 풍기가 문란한 사람으로 씌여 있으나 김춘추가 그런 사람에게 사랑하는 딸을 맡겼을것 같지는 않았을 것 같다. -허나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도 김품석의 사생활과 행실이 문란하고 재물과 여색을 탐한 것으로 나와 있다. 글로된 기록은 이래서 무서운 것이다. 조선시대의 사관들이 자부심이 매우 강했던 것도 그들에 의해 왕의 행적이 기록되기 때문이었다.- 몰래 대야성을 공격하려던 윤충은 마침 품석에게 그의 아름다운 아내를 빼앗기고 통분해 있었다던 장수 금일( 日)의 은밀한 내통으로 뜻하지 않게 쉽게 품석부부를 사로잡았다.

백제가 공격해 오면 안에서 내응하여 주겠다는 금일의 은밀한 연락을 받은 백제군이 대야성을 포위하자 금일은 성안의 곡식창고에 불을 질러 군량을 모두 태워 버렸다. 그러자 성안은 동요되고 싸울의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품석부부는 하는수 없이 윤충에게 자신들 부부를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여 주면 성을 내어주겠다고 제의했다. 윤충은 자신들만 돌아가게 해 달라는 이들 부부의 행위에 모멸감을 느끼면서도 그러마고 하여 주었다.

그리곤 복병을 두고 병사를 물렸다가 일부 군사와 함께 품석부부가 성밖으로 나오자 기습하여 병사들을 죽이고 품석부부는 금일에게 죽음을 당했다. 김춘추는 딸의 죽음을 듣고는 반드시 원수를 갚아주겠다며 눈물로 하늘에 맹세했다고 한다. 이후 김춘추는 고구려에 힘을 요청했다가 연개소문에게 퇴짜맞자 당나라에까지 가서 군대를 요청하였다.

신라의 삼국통일의 대업이란 것은 절반은 복수의 일념과 절반은 삼국중 가장 약소국이 외세의 힘을 빌어서라도 삼국을 평정시키겠다는 야심에서 비롯된 것이 된다. -필자가 너무 깎아내린 것일까?-

만일 이렇다면 윤충의 행위는 김춘추가 당의 세력을 끌어 들이게 한 큰 원인이 될것이다. 윤충의 속임수는 또한 장수로써 자신의 말을 뒤집은 행동이었다. 아무리 싸움터라 하지만 아마 그당시도 장수답지 못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전쟁터에서의 음모와 계략이 아니라 목숨만 살려달라는 사람을 매몰차게 속인것이다. 그러나 윤충의 행위도 그 원인을 보면 그러할만도 하게 된다. AD 551년 신라 24대 진흥왕, 백제 성왕 때 신라와 백제는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크게 영토를 빼앗았다. 이때 고구려는 돌궐(突厥 : 아마 투르크 같음)의 공격을 받고 그쪽 방면의 전쟁에 전력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이때 돌연 신라군은 발을 돌려 백제군의 허리를 끊어 지금의 경기 황해 일부지역을 차지하여 버렸다.( 이 지역을 황하.북경 지역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백제군과 협력 고구려의 여러성을 빼앗고는 갑자기 후방이 빈 백제군을 공격하고 백제땅을 차지하여 버린것이다. 백제는 영토만 빼앗긴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 싸우러 떠난 병사들까지 그쪽에 남아 평양 근처의 백제군은 위로는 막강한 고구려군과 아래로는 신라에 막혀 궤멸되고 말았다. 진흥왕은 경기와 황해의 일부지역을 차지하고는 재빠르게 고구려와 강화를 맺은 것이다. 격분한 성왕은 남은 군사로 신라를 공격하여 한때 큰 피해를 입히기도 했으나 신라의 복병을 만나 전쟁터에서 죽고 말았다. 그뒤 백제와 신라가 더욱 견원(犬猿)의 사이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윤충이 품석 부부를 죽인것이 AD 645년 쯔음의 일이니 아직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을만도 할것이다.

진흥왕이 돌연 행동을 바꿔 백제를 공격한 것도 그 이전 수백년동안 서로 싸우고 싸우며 백제 에게 당한 많은 수모에서 나온 계책 -그 시절에는 흔히 있을 수 있는 행위이다- 이라 할만하니 그 이전의 일들은 지나치게 세세히 따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끝내는 두나라중 한나라는 존재해서는 안될 지경에 까지 갈것이다. 이 시대의 이야기 역시 2권 문화편에서 다시 다루어 볼 계획이다.

경애왕은 너무 밖을 살피지 않은 사람이었음을 말하려다 얘기가 길어졌다.

경애왕이 태음인이라는 말은 아니다. 태음적인 행위를 하였던 것이다. 견훤은 소양인으로 판단되는 사람이다. 혹 다른 사상인일수도 있다. 견훤은 서기 867년에 태어났고 원래 성은 이(李) 였는데 후에 견(甄)으로 고쳤다. 지금의 상주(尙州) 지역에서 태어났다 한다. 삼국 유사에 의하면 견훤의 아버지는 아자개(阿慈介)라 하고 농사를 짓다가 지금의 상주지역을 차지하고 자칭 장군이라 했다 하는데 농사일을 하다 어떻게 장군이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다. 역시 삼국유사에 의하면 아자개는 진흥왕의 손자 작진(酌珍)의 아들이라 한다. 그러나 견훤은 진흥왕보다 수백년 뒤의 인물인데 단지 3대로써 나와있으니 이도 의문점이 너무 많다. 한단고기에는 아자개는 신라의 장군이라 한다. 견훤에게는 또한 전설 따라 삼천리 식으로 전해오는 지렁이에 얽힌 이야기도 전해진다.

다 그렇지만 어려서부터 남달리 출중하였다 한다. 신라 진성왕 당시 정사가 문란한 상황속에서 일개 비장이던 견훤은 무리를 모아 신라를 공격하였다. 당시 신라의 정권은 신하들이 좌지우지 하고 있었고 백성들은 피폐해져 있는 상태였다. 견훤의 군대는 가는 곳마다 승리를 하고 인심을 모았다 한다. 이에 자신을 얻은 견훤은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를 성토하며 백제의 원수를 갚겠다며 나라를 세워 후백제라 하고 완산에 도읍을 정한후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후에 왕건도 철원지역에서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웠다.

견훤은 왕건과 한편으로는 화해하고 한편으로는 경쟁하였고 중국땅에 사신까지 보낼 정도로 시야가 넓게 행동하였다.

견훤은 이후 더욱 강해져 신라 서울을 침범 경애왕을 죽이고 그 왕비를 강간하고는 각종 재물과 무기, 사람들을 붙잡아 돌아갔다 그러나 마치 항우가 진나라 군사 20만을 생매장해 죽이고 낙양을 도륙하고 아방궁을 불지름으로 인해 민심이 유방으로 돌아섰듯 이때의 일을 기화로 신라의 민심은 왕건쪽으로 돌아선듯하다. 왕건은 광개토대왕이나 연개소문 같은 대담성과 용맹무쌍함은 없으나 야전에서의 능력도 좋고 포용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견훤은 용맹하고 날래고 지략이 뛰어 났으나 산업을 발전 시키지 못했고 어머니 같은 부드러움과 포용력이 부족했다.

이러한 군대는 다음과 같다. 한번 크게 패하면 다시 일어나기가 힘들어진다. 또한 적이 없어지면 스스로 설 자리를 잃어 버리거나 자기들끼리 싸우게 된다. 견훤은 연개소문처럼 매우 독재적인 지도력을 가지려거나 아니면 히데요시처럼 사람을 모아 생산과 부를 증가시켜야 했을 것이다. 당태종 이세민이 했던 말이 있다.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이 없으면 배가 뜨지 못한다." 견훤의 군대는 용맹하고 날래고 강해서 왕건은 몇번이나 크게 패했지만 곧 세력을 회복하곤 하였다. 그러나 견훤은 지략과 용맹에서 모두 앞섰지만 견훤 자신의 성격의 냉혹함에 의해 배반자가 속출하고 그 세력은 모래위의 성이나 마찬가지 였다. 견훤 스스로가 그 아들에게 한말이 있다.

" 내가 신라 말년에 후백제를 세운지 여러해가 되어 군사는 북쪽의 고려군사보다 갑절이나 되나 아직도 우리에게 불리하기만 하니 이는 아마 하늘이 저편을 돕는것 같다. 그러니 차라리 고려 왕에게 귀순해서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

물론 그의 아들들은 불응하였다. 군사가 갑절이나 되면서도 늘 불리한것은 하늘이 왕건을 도와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남을 물리쳐서일 것이다. 또한 군대만 용맹했지 민중의 기반을 키우지 못해서 였다. 소양인은 거처가 불안하다 하였었다. 그만큼 거처에 신경을 안쓰고 밖의 일만 생각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견훤은 네째 아들 금강에게 애정을 쏟고 왕위를 전해주려 하였었다. 이에 큰아들 신검이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켜 견훤을 유폐시키고 금강을 죽여버린후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일이 발생했다.

가엾은 완산(完山:지금의 전주) 아이 아비 잃고 울고 있네

이때 이런 동요가 불려졌다고 한다. 견훤은 호라티우스의 말마따라 더욱 잔혹하든가 아니면 왕건을 본받아야 했던 것일까? 얼마후 견훤은 꾀를 내어 고려로 도망쳤다. 물론 왕건은 거저 굴러들어온 호박인 견훤을 극진히 우대하였다. 왕건은 가는 곳마다 인심을 얻기에 주력하여 그 군령(軍令)이 엄하고 분명하여 함부로 사람들을 범하는 일이 없었다 한다. 견훤이 투항하여 오고 곧이어 견훤의 사위 영규마저 은밀히 안에서 호응할 것을 연락하여 오니 후백제의 운명은 이제 왕건이 주사위를 잡고 있는 것이 되었다.

후백제 역시 고구려처럼 가족간에 분쟁을 하다 무너진 것이다. 이는 소양형 문화의 특징의 하나이기도 하다.

서기 936년 영류의 은밀한 내응을 기화로 왕건은 신검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했다. 한국판 세끼가하라가 천안근처 일리천에서 펼쳐졌다. 신검역시 대군을 이끌고 대적했지만 승패는 이미 결정나 있었다. 두 나라의 싸움은 맥없이 신검이 패해 왕건의 승리로 돌아가고 신검과 그 부하 장수들은 사로잡혀 버렸다. 덤벙덤벙 받아들이고 가는곳마다 곳곳의 호족의 딸들과 혼인을 하여 세력을 키우고 별로 뛰어난 용맹과 지략도 없었지만 왕건은 매우 엄정하고 속이 깊었으며 생각과 논리가 정확한 사람이었다.

왕건은 엄격하고 냉정하게 항복한 자들을 분류 견훤을 몰아내는데 일조한 옛 견훤의 신하들은 목을 베고 견훤의 아들 신검은 부하들의 위협에 그리 행동한 것으로 이유를 대어 살려준다. 이를 분하게 여긴 견훤은 수일만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왕건은 영규에게도 크게 공로를 치하하였다.

이쯤에서 왕건의 사상인 분류도 어느정도 되었을것 같다. 왕건은 태음인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