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의 발생배경과 발전

은나라는 600년간 이어져 내려왔는데 그 동안 8번에 걸쳐 수도를 이동시켰지만 그때마다 박(  )이라는 명칭은 꼭 갖고 다녔다." 박"은 지역적으로도 중국내륙 깊숙히 있던 것이 아니라 그래도 바다쪽 - 아마도 강릉에서 서울까지의 직선거리 정도 - 에 가까이 있었으며 당시의 단군조선과의 제국들과 매우 가깝게 위치해 있었다. 아니 서로 섞여 살고 있었을 것이다. 반면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周)나라가 위치한 지역은 내륙 깊숙히 위치해 있었으며 진시황의 진나라가 있던 지역도 이지역이었다.( 필자는 이 박(  )도 ' 밝다 '의 음에서 나온 글이 아닐까하는 무리한 생각도 든다. )

그러나 은나라는 비록 단군조선과 가까이 있었다 해도 같은 국가나 제후국의 관계는 아니었다. 은과 단군조선의 관계를 오늘날의 국가와 국경선 개념으로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현재의 중국민족과 한국민족이 민족적으로 완전히 구별되기 시작한 것은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하고, 육국(六國)의 역사와 문헌을 모두 없애버리고 문자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분서갱유를 실시, 과거의 여러 나라들의 역사를 지우기 시작한 이후라고 생각된다. 주나라 주공 때부터 시작되었던 이러한 흡수와 통합의 작업은 한자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전통이 되어 해를 거듭할수록 영토와 세력을 키워나갔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종족이나 민족이 아니라 ' 한자(漢字) ' 라는 글자였을 것 같다. 옛날에도 여러 나라나 부족, 서로간의 교류는 매우 중요했다. 특히 소금은 매우 중요한 물자였을 것이다. 이러한 교류는 여러 부족이나 종족들간에 공통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을 필요로 했고, 이 수단은 ' 글자 ' 가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 한자(漢字) ' 라는 글자가 민족 형성에 큰 몫을 하였을 것이라는 거다.

주나라 이전 은나라때까지만 하더라도 단군조선과 은나라는 큰 구별이 없이 서로간 선린관계를 유지하던 같은 동이문화권의 국가였었다. 그러던 것이 오늘날의 한(漢)족과 중원 내륙서쪽과 남방계민족이 종족의 구성원이던 주(周)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차지하면서부터는 단국조선과 주나라는 색깔이 좀더 구별되기 시작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것은 이미 은나라때부터도 있었지만 은나라 때만하더라도 은나라 사람들은 동이문화권과 꽤 가까웠으리라 생각된다. 요·순임금 다음 하나라 이후 은나라를 거쳐 주나라가 개국하기까지는 천일백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1000년의 세월이 흐르며 특히 진, 한나라를 거치며 그 지역의 단군조선계열의 종족과 한국인의 선조들은 이질적인 풍습과 언어와 문화를 가지게 되었을것 같다.

유학을 이야기하며 말이 길다고 생각할 것이다. 유학의 근원을 말하자면 은나라를 빼고는 말할 수 없다. 공자가 스스로 은나라 사람이라 말한바 있고 - 주가 은을 멸망시킨지 500년이 지났는데도 - 노나라의 수도였던 엄(奄)이라는 곳은 단군조선과 은나라가 세력다툼을 하던 곳이며 은나라의 수도이기도 했던 역사 깊은 곳이기 때문이다. 공자가 옛성현의 글이 모두 여기에 있다했던 노나라의 사고에는 당연히 주나라보다는 은과 노나라의 기록들이 풍성했었을 것이다. 공자의 조상이 되는 설이 고신과 융(戎)족의 여인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은 그 시대에는 桓族과 현대 중국인들의 주류라고도 할수 있는 종족이 깊은 교류를 맺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戎은 뒤에 나오지만 중국사서에 서(徐), 회(淮), 적(狄)이라 부르던 단군조선의 민족이다.) 즉 지금의 중국인 상당수도 옛날에는 桓族이었다는 것이다.

공자가 감탄한 기록들과 사료들에서 이후 2500년을 이어져오는 유학 사상의 뿌리가 만들어졌기에 이토록 말을 늘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유학이 그 뿌리는 바로 소위 동이문화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다. 동이(東夷)문화는 바로 지금 한국인들의 선조들의 문화였다. 소위 황하문명은 오늘날의 중국인들에 의해서만 건설된 문화가 아니다. 그것이 헌원이후 시나브로 시나브로 잠식되어져 가다 주나라의 주공과 진시황 이후 그리고 북부여의 멸망 이후 동이문화 곧 한(桓)문화는 역사 속에서 잊혀져 가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어느 때부터인가는 스스로가 이루었던 문화가 다른 문화에 의해 변화된채 수입되어져 버린 것이다. 우리로서는 잃어버린 ' 잉카 ' 인 것이다.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는 주나라 주공(주무왕의 동생)이 재차 동쪽의 옛 은나라 지역을 공략할 당시 만들어진 나라이다. 그 이전의 노나라는 처음 주의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켰을 당시 더욱 내륙쪽에 있었었다. 주공의 동방 공략 후 세워진 노나라의 수도는 그전에는 엄(奄)이라 했었으며 은나라가 도읍을 옮기기전 100년간에 걸쳐 본거지로 하였던 곳이다.

엄(奄)의 글자 풀이는 대(大)와 신(申)의 합자로써 크고 넓음을 뜻하고 있다." 박 "- 높은 곳에 의지하고 있는 형태 - 과는 상대적인 것 같으면서도 비슷한 뜻을 갖고 있다. 상대적인 것은 奄은 높은 위에서 아래로 덮은 것이고 "박" 은 낮은것에서 솟아있는 뜻이며 비슷한 뜻은 크고 높다는 또는 높은곳에 있다는 것이다. 즉 ' 밝다 ' 는 의미를 그리하여 ' 하늘 ' 또는 ' 빛 ', ' 태양 ' 의 뜻을 가지고 있고 모든 것의 중심을 가리키는 단어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의미에서 생긴 글자를 은나라는 박( )이라 했지만 단군조선에서는 엄(奄)이라 했을 것 같다.

주공의 동방공략후 주공의 아들 백금(伯禽)이 奄땅에 제후로 봉해졌는데 이것이 사기가 말하는 노나라의 기원이 된다. 공자가 태어날 당시 아직도 노나라에는 은계열의 민족과 주계열의 민족이 공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단군조선계열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노나라 지역내에 있던 단군조선계열은 중국역사서에는 모두 은나라 사람들로 지칭되었을듯하다. BC 502년 노나라의 중신 양호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주나라 사람과는 주의 서당에서 서약하고 노나라 백성들과는 은의 사당에서 맹약을 맺었다할 정도였으니 은나라의 유민들은 멸망 후 500년이 지나서도 독자적인 문화권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노나라는 이름만 노나라일뿐 은나라나 마찬가지의 나라라고 생각할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웠다고 중국인들이 모두 만주족이 아님과 같다.

주나라는 원래 은나라의 제후국이었다. 그럼 은나라와 단군조선간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 22세 단군 색불루 을묘 20년 (BC 1266)

이때에 남국(藍國)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쫓고 남으로 이동하 여 奄讀忽(엄독홀)에 머물렀으니 은나라 땅에 매우 가까웠다.

23세 단군 아홀 을유 2년 (BC 1236)

남국의 임금 금달이 청구의 임금 구려의 임금과 주개(周愷)에서 회합하고 蒙古里(몽고 리)의 병력을 합쳐 가는곳마다 은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히 오지로 들어가 회대의 땅을 평정하더니 포고씨(蒲古氏)를 엄(淹)으로, 영고씨(寧古氏)를 서(徐)땅에 방고씨(邦 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임명해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보며 두려워하 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

이 글은 단군조선과 은나라와의 갈등을 쓰고 있다. 같은 단군조선계열이라 하여놓고 서로 다른 나라취급을 하여 혼란스러운 분도 있을 것 같다. 같은 문화권이지 같은 나라는 아닌 것이다. 오늘날의 남북한이나 삼국시대의 고구려 신라 백제간의 관계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주 무왕이 은나라를 쉽게 무너뜨린 이유도 은나라는 단군조선과의 갈등에 국력을 많이 소모한 탓이기도 하다. 은나라의 주왕은 한때 동방(단군조선의 지역) 공략 도중 많은 국력을 소모했다 한다. 은나라와 단군조선과의 우호선린관계는 은나라 왕 무정(BC 1339∼1280)때 부터 금이가기 시작하여 22세 단군 색불루 때는 은(殷)의 서울까지 쳐들어가기도 하였었다(BC 1285). 은나라와 단군조선의 우호관계는 은나라 탕(湯)왕이 하나라 걸(傑)왕을 공격할 때 도움을 준 일이 비롯되었던 듯하다. 그 이후 은과 조선은 옛시절인 요순시절처럼 화친관계에 있었을 것 같다. 단군세기에는 은나라의 멸망에 대한 언급이 없다. - 이에 비해 하나라의 멸망과정은 기록되어있다 - 25세 단군 솔나 재위시 정해 37년(BC 1114) 箕子가 西華에 옮겨 살았다하여 은의 멸망을 추측할 수는 있으나 특별한 언급은 없고, 29세 단군 마휴 재위시 무인원년(BC 943년) 주나라 사람이 공물을 가져왔다는 기록만 보인다. 심지어 단기고사는 끝까지 은나라의 멸망을 모르고 있거나 말하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에 관해서는 따로 전문서적을 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기자조선에 대해서도 다른 각도의 해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 노나라 수도였던 奄이 한때 단군조선과 은나라의 문화권이었다는 사실에는 별 이견이 없을줄로 생각한다.

춘추좌씨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BC 525년 - 이때는 은이 멸망한지 600년 후이다 - 산동에 남아있던 은부족의 우두머리인 담나라(한단고기에서 말하는 남국, 람국, 藍國일 것이다) 우두머리가 노공에게 공물을 가지고 와서 말했다.

" 우리 옛조상 소호가 즉위하자 때때로 봉황이 왔다. 그래서 새를 근본으로 하여 새이름으로 관명을 붙였다. 봉황씨는 역법을 관장하고, 현조씨는 춘분·추분을 관장했다. "

은나라는 새를 숭상하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현조는 제비를 말하는데 봄이면 오고 가을이면 가는 새니 옛사람들은 곡식의 뿌리고 거둠을 관장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법도 하다. 봉황은 오늘날 한국 대통령의 휘장에도 그려지는 새이다. 소호는 소호금천씨를 말하며 삼국사기에는 신라를 세운 주력씨족이다. 문정창씨에의하면 소호금천씨는 서구문명의 뿌리라는 슈메르 민족과 혈통이 같다. 슈메르 민족은 오늘날의 이스라엘민족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기도 하다.

한국인들이 아직도 노래나 소설속에 ' 새 ' 에 대해 많은 경외심을 갖고 있음에 반해 중국인들은 용을 숭상했다. 그리고 아직도 숭상한다. 지금도 명절때가 되면 중국인들은 폭죽을 터뜨리며 여러명이 용의 모양을 한 기구를 들고 뛰어 다니는 것을 TV를 통해 볼수 있을 것이다.

은나라 곧 동이문화권에는 노나라 외에 韓나라, 宋나라도 속해 있었다. 宋나라 사람들은 여러 사서(史書)를 통해 보면 어리석거나 성급하고 경솔한 인물들로 통하고 있다.

나라를 잃은 국가의 사람들은 멸시받고, 조롱받게 되어있나보다. 몇가지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옛날 宋나라 사람이 논에 갔다오더니 가족에게 이제 벼가 쑥쑥 잘 자랄 것이라고 하였다. 가족이 논에 가보니 잘자라라고 벼를 모두 뽑아 놓아 전부 죽어있더라는 이야기가 맹자에 나온다

. 송양지인이라 하면 순진하고 의롭지만 바보 같고 어리석은 인물의 대명사로 통한다.

기원전 638년 초(楚)나라의 대군이 송나라에 침범해 왔다. 송나라가 방어진을 펴놓고 있던 강가 앞으로 초나라의 군사들이 대오가 흐트러진채 강을 건너고 있었다. 이를 본 참모 자어(子魚)가 송(宋)양공에게 초의 많은 군사들에 비해 송나라의 적은 군사로는 중과부적이니 이때 공격하자고 했다. 그러나 송양공은 들은채도 하지 않았다. 초군은 간신히 강을 건넜지만 좀처럼 전열을 가다듬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야 말로 공격할때 라고 부하들이 재촉했으나 송양공은 초연했다. 초군의 전열이 정돈된 다음 송양공은 공격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송나라 군사들은 대패하여 측근의 부하들은 전멸하고 송양공도 부상을 입은채 간신히 살아남았다. 전쟁후 나라안에 송양공을 비난하는 소리가 빗발쳤으나 송양공은 좀처럼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한술 더 떠서

' 적이 곤란한 틈을 노려 공격하는 것은 군자의 취할 길이 아니다. 비록 망국의 자손일지라도 대열을 갖추지 않은 적을 향해 북을 치지는 않는다 했다. '

이에 대해 목이는

' 싸움이란 승리가 목적이다. 군자의 예의를 지키려면 처음부터 싸우지 말고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것이 낫다며 분개했다 ' 한다.

송양공 역시 전쟁때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이듬해에 죽었다.

송양공은 한때 주변의 몇나라와 동이족들을 통합, 춘추전국의 맹주가 되어 옛 은나라 시절의 영화를 되돌려 보려고도 한 사람이다. 아마 뜻이 너무 컷기에 이런 일이 생긴듯도 하다. 공자나 맹자가 말하던 인의(仁義)의 모범을 보이려고 했던 것일까? (공자나 맹자는 송양공보다 후대의 인물이다) 그러나 송양공은 인의(仁義)를 지키려다 자신의 나라도 그리고 스스로도 나머지 나라들의 조롱을 받았다. 송양공이 은나라 사람들과 동이(東夷)의 여러부족들과 함께 옛날의 영광을 되돌리려 했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표본인 옛 은나라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노나라에 미생(尾生)이라는 정직한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남하고 무슨 약속을 하면 정말 죽어도 지키는 사람이었다.

한 번은 개울가 다리밑에서 연인을 만나기로 했었는데 비가 내려 개울물이 불어나는데도 연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물은 점점 불어 무릎으로 허리로 가슴으로 목까지 차올랐으나, 미생은 끝까지 피신하지 않았다. 결국 물은 머리끝까지 차오르게 되어 교각에 매달려서도 미생은 피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미생은 물에 떠밀려 죽고 말았다.

송양지인의 주인공과 너무나도 닮은 사람이다.

은나라가 망할 때 은나라의 제후국인 고죽국에 (한단고기에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라 되어있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라는 형제가 있었다. 이들은 형제로써 서로간에 왕위를 양보하다가 결국 두 사람 다 자신의 나라를 떠나 은나라와 주나라의 사이 어딘가 에서 살았었던 것 같다. 주의 무왕이 은나라를 침공할 때 이들은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마음을 돌릴 것을 간했지만 무왕은 이를 듣지 않고 은나라를 공격, 멸망시켜버렸다. 은의 멸망 후 백이와 숙제는 도의를 저버린 周나라의 곡식을 먹을수 없다하여 수양산이란 곳에서 고사리만 캐어먹다가 나중에는 그것도 주나라의 곡식이라 하며 먹지않고 굶어 죽었다 한다. 이것이 이른바 의로운 행위일까 어리것은 것일까. 하여간 공자는 백이와 숙제의 이러한 마음과 절개를 높이 평가, 충신의 표본으로 - 즉 기준으로 - 삼았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도 어쩐지 송양공이나 미생과 비슷한 성격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백이, 숙제가 살았던 고죽국은 오늘날 요동반도와 북만주지역에 있었다. 그리고 이 지역은 고구려 주몽이 피신하였던 졸본부여 지역으로써 주몽의 두 번째 부인이자 백제 시조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인 소서노가 살았던 지역이다. 백이, 숙제는 각 첫 자와 끝자를 따면 백제가 되어 百濟와 우리말 음이 같다. 백제는 졸본부여계의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건설한 국가이기도 하다.

송양공이나 미생은 보기에 따라 어리석고 무능하고 앞뒤 꽉 막힌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어찌보면 순진하고 고지식하고 약삭빠르지 못한 사람들이기도 한 것 같진 않나? 송양공이나 미생 등을 보면 꼭 명분과 의리에 얽매여 있던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생각난다. 어리석은 송나라 사람들이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宋의 농부가 밭갈이를 하고 있던 날이었다. 산으로부터 한 마리의 토끼가 갑자기 튀어나와 밭에 있는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쳐 목이 부러져 죽었다. 의외의 수확에 기뻐한 농부는 그날부터 경작을 그만두고 매일 그루터기를 지켰지만 그날 이후 두 번 다시 그 그루터기에 부딪혀 죽는 토끼는 없었다 한다.

이글 역시 나라를 빼앗긴 송나라 유민들을 조롱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러한 송나라나 노나라 사람들이지만 이 지역은 공자뿐 아니라 장자와 묵자 그리고 맹자 등의 대사상가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장자 역시 이(夷)족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夷)족 즉 단군조선의 문화에 영향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장자는 일찍이 송나라 땅에서 소 관리 노릇을 한 일이 있었다 한다. 이야기가 곁가지로 흘렀었다.

순임금 이후 우임금에 의해 하나라가 개국되면서 황하유역의 동이문화는 둘로 나뉘어 조금씩 구별되기 시작한 듯하다. - 편의상 동이문화라 하였다 - 우(禹)가 하나라를 개국할때는 순임금과의 사이에 큰 갈등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禹는 요임금의 손자로써 그 아버지 곧 요임금의 아들 단주는 요가 순에게 임금자리를 넘길 때 모종의 사건에 휘말려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아직 그 당시는 오늘날과 같은 국가 개념과 민족 개념이 뚜렷하지는 많은 때였을 것이다. 지도자가 누가 되건 그 지역의 사람들은 잘먹고 걱정 없이 살기만 하면 되던 시대였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를 요순시대였다 하여 노자도 공자도 가장 이상적인 사회 형태로 보고 있다. 이러한 요순시대가 이루어졌던 지역은 단군조선의 변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