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세기에서는 순임금을 두고 회대지방 - 황하 하류와 양자강 하류 사이의 지역 - 을 다스리던 제후로써 쓰고 있다.

「 갑술 67년 (BC2267) … 회대 지방의 제후들을 평정하여 분조를 두고 다스렸는데 우순(虞舜)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

- 단군세기 -

우는 나라이름, 순은 왕의 이름이다. 회대(황하와 양자강 사이의 곡창지대)지역을 평정하고 우나라의 임금 순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는 말이다. 순에게 통치를 맡겼다는 지역은 서경에서 말하는 요임금이 순에게 왕위를 넘겨준 지역을 말할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공자는 이 지역 단군조선의 종족들을 오랑캐로 구별, 옛 은나라와의 관계를 단절시켜 버렸다. 그리고 은나라를 오늘날의 중국역사로만 편입시켜 버렸다.

그러나 공자 생존시만 하더라도 아직 주나라는 옛 은나라 사람들을 완전하게 통합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주나라와 은나라는 이질적인 풍습과 문화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공자는 동쪽에 가서 살고 싶다느니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대를 이어 놓겠다는 야심만만한 포부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속에서 유학은 공자에 의해 집대성 된것이다.

공자가 유학을 집대성할 당시는 제자백가시대라 하던때로 각 나라의 왕들이 경쟁적으로 인재를 모으고 있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아직껏 사람들 입에 회자되는 뛰어난 인물들과 사상들이 생겨났고 소멸해 갔다. 유가 외에 법가, 묵가, 도가, 농가, 음양오행가, 병가, 명가 등이 있었으며, 많은 걸출한 인물들이 춘추시대 각 나라들을 유세하며 다니던 때였다. 그 중에서 유가는 제천의식에서 유래한 제사를 행하며 조상을 공경하고 성인의 가르침을 따르며 소위 군자의 도를 설파하던 일개 학파였다. 그러던 것이 공자라는 뛰어난 인물에 의해 체계적으로 기틀이 마련되며 학문, 사상, 윤리, 도덕, 인격에 관한 이론이 완성되었다. 공자는 마치 예수나 부처처럼 제자들을 받아들여 교육시켰고 그 제자들에 의해 제자백가 중에서도 입지를 강화시켜 나가게 되었다. 공자의 뒤를 이어 자사, 맹자, 순자 등은 타학파들과의 경쟁속에서 이론적·사상적 내용을 더욱 강화시켜 나갔다. 화이트 헤드가 ' 학설들간의 논란은 기회이다 ' 라고 한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춘추시대 학설들간이 경쟁은 그 학설을 주장하는 인간들의 생존경쟁이기도 하였다. 말 한마디에 일국의 재상이 될 수도 죽음을 당할수도 있었다. 타 학파보다 더 논리적이고 체계적이고 현실적이지 못하면 도태되고 매장 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자신의 영화와 생존과도 관련되어지는 것이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현실에서의 유가의 이론은 확실히 법가에는 못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인 진나라도 법가의 사상으로 국력이 급신장 하였었다. 그런데 어째서 법가의 사상은 유가의 사상속에 흡수되었을까?

필자가 생각하기에 법가의 사상은 유물론적이고 유가의 사상은 유심론적이라 할 수 있다. 아마 중국인들의 심성이 아니 모든 인간들의 심성이 원래 유심론적이어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이 되고, 역사적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을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까지 유학이 발전적으로 내려오게 된 이유를 캐어보겠다.

총이 권력이고, 총구가 법이라면 방아쇠에 걸려있는 손가락을 움직이냐 마냐는 인간의 마음이다. 통치 기술 혹 전국시대의 패자가 되기 위한 방법론에서는 법가의 사상이 무수할지라도 승리자가 되기 위한 방법론을 행하고 같이 일을 도모하는 것은 사람들인 것이다. 이 가변적이고 모순적인 인간을 다루고 통치하는 측면에서 유가의 이론이 법가보다는 어쨌든 한 수 위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중국인들은 현실에 나서서는 유가를, 현실에서 물러나서는 도가를 믿는다고 한다. 이런 말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혁명 이전에는 법가, 혁명 이후에는 유가, 혁명 실패시에는 도가라고, 유가의 이론은 그 시대의 통치자나 새로운 왕조를 열은 왕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바로 임금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는 것이다. 天命의 사상이다. 하늘이 명하여 왕이 되었으니 왕은 특별난 존재일수 밖에 없다. 유가의 이론은 군주가 한 국가를 이끌어가기에 마음에 드는 논리와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유가의 학설은 도가와 법가의 이론가들에 의해 현실적이지도 못하고 이상적이지도 못한 것으로 무시되고 조롱 받기도 하였었다.

그렇지만 자사가 나오고 맹자가 춘추전국을 유세하며 제자백가의 사상가들과 논쟁을 벌이고 뒤이어 순자가 나오며, 근근히 그러나 점차적으로 그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아마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유학을 국가의 근본적인 이념으로 확정하며 그 위치를 확고히 굳히고 영향력을 범지역적으로 넓히게 되었을 것 같다.

그저 성인의 가르침이나 배우고, 경전이나 암송하는 그다지 현실적이지 못한 유학의 어떠한 면이 민족적인 한 국가 더 나아가 범국가적으로까지 영향력을 갖게 되었을까?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는 천명사상도 큰 이유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알다시피 유학에서 임금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 일부종사니,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느니, 충이니, 의(義)니 하는 단어들은 모두 유학에서 중심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누가 통치자가 되건 통치자는 유학의 이론이 마음에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권력자에게 이보다 더 매력적인 것이 어디 있을까. 이점은 기득권층에게도 또한 새로 기득권을 갖게되는 계층에도 흥미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 혁신적인 변화는 바로 스스로의 몰락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왕이 되건 왕 자신까지 제도에 옭아매는 기계적인 법가의 사상보다는 어느 정도 옛 규칙을 따르고 - 혹 따라주고 - 학문을 배워 입에 올리기도 하며, 별다른 과실만 없다면 자신을 하늘로 받들어주는 유가의 사상이 마음에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 착안, 공자는 최후의 승리자의 마음에 맞는 사상을 만들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렇게 이용되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시절에는 왕에게 모든 힘이 집중되어 있던 시대였다. 왕의 말 한마디에 법가든 도가든 불교든 그 시대의 근본적인 이념이 정해질 수 있던 시대였다. 공자는 혹 이런 점을 노리지 않았을까?

유학의 강점은 또 있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그 제도의 운명은 선하든 악하든 유능하든 무능하든 변덕스럽고 이기적인 인간들이 맡게 되는 것이다.

또한 어느 시대 어느 사회건 기득권자와 지배집단은 있게 마련이다. 권력을 잡은 왕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유가의 사상을 선호하면 지배집단 역시 변화가 많고 자신들의 지위가 흔들리거나 위협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체제 안정을 원할 것이다. 이런 필요성에 충실히 대답해줄 수 있는 것이 유학이다. 누가 지배층이 되건 바로 그들에게도 유학의 사상은 선호되게 될 것이다. 공자는 바로 이런 점도 간파하였던 것 같다.

다음의 이야기는 공자가 부처나 예수처럼 약자에 속하는 인간을 구제하려 했다는 가정이 전제가 된다. 그리고 실재 공자는 그러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공자는 어떤 세상이 오더라도 그 사회에는 계급적 질서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아래 기득권 계층의 사람들에게 군자에 대해 설파함으로써 그래도 그들이 도리와 이상과 도덕이 무엇인지 알고나 있게하여 최소한 선하지는 못하더라도 위선적인 행동이라도 하게끔 만들려 했을 것 같기도 하다. 이른바 군자의 기준, 진짜 멋있는 남자의 기준을 정해 놓은 것이다. 물론 위선적이 아니라면 그것이 바로 플라톤이 말한 철인정치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송대에 이르러 재도약하기 전까지 유학에서 주로 설파한 것은 소위 君子의 道였다. 이전까지는 개인적인 수신과 다스림의 학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공자는 소위 군자의 도(道) 즉 강자, 다스리는 자, 이기려는 자의 ,이기고 난 자의 행위 할 바를 박식한 지식을 가지고 조목조목 나열함으로써 그가 꿈꾸던 이상국가를 이루고자 하였던 것 같다. 유학에서 가르치는 경전을 충실히 배우고 책대로 행위 함으로써 이상사회가 이룩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었을 것이다. 필자의 추측일 뿐이다.

공자, 맹자에 의해 이룩된 유가의 사상은 제사상에는 젖가락을 어떻게 두드려야 한다까지 규제일색으로 너무나 지당하고 너무나 자세하게 행위 할 바를 정해놓음으로써 개혁의 여지가 없다. 유학에서는 무엇이 할 바이고, 무엇이 최선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 군자는 이 세상 모든일에 대해 옳고 그른 것을 정한 것이 없으며 오직 의(義)를 좆아서 의와 함께 살아가느니라. 」

- 논어 里仁 -

철저한 자기 절제와 규제 속에서 생겨난 호연지기를 가지고 의를 쫓으니 자기는 무조건 옳을 것이다. 유학은 명분과 당위만 있지 법가적인·기술적인 면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기껏해야 인간의 심리나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 맹자가 양혜왕을 만났을 때 양혜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 어떻게 해야 장차 내 나라가 이로움이 있겠습니까? "

맹자가 대답했다.

" 왕께서는 어찌하여 利만 말씀하십니까? 왕이 利를 밝힌다면 대부도 관리도 백성도 모두 利만 쫓을 겁니다. 오직 인과 의가 있을 따름입니다. 진실로 의를 뒤로 돌리고 이익을 앞세운다면 백성들은 서로간에 다 빼앗지 않고는 만족하지 않을것입니다. 어질면서 그의 어버이를 저버리는 자 있지 아니하며 의로우면서 그의 임금을 뒤로 돌리는 자가 있지 아니 하였습니다. " 」

- 맹자 -

맹자의 첫 장에 나오며 큰 줄기를 말하고 있는 글이다. 지당한 말씀이다.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두뇌는 군자의 머리도 전자계산기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양혜왕이 " 아! 역시. " 하고 무안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맹자가 잠시 후 돌아간 뒤 홀로 남았을 때 양혜왕은 고개를 갸우뚱했을 것이다. " 그래 그렇다하자. 그런데 어떡하란 말인가? "

왕이 인과 의를 말한다고 하루아침에 부패하고 무능한 관리들이 이제껏 그렇지 않았던 왕의 뜻을 받들어 인과 의를 실천 할 리가 없다. 아니 그렇게 하고 싶더라도 사회구조가 그러하지 못할 것이다.

양혜왕은 속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 젠장 누가 그걸 모르나. 될걸 말해야지. "

어쩌면 기술적인 측면은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미국에는 미국 나름대로의 기술적인 사람들이 있고, 일본에는 일본대로의 기술적으로 풀어야 할 일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과 의의 마음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일수 있는 것이다. 단지 인간의 마음과 행위만 다루면 되고 그외 사회생활에서의 여러 기능적인 행위는 그 사람의 개인적인 능력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유학에서도 군자의 도만을 말하며 현실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한 마을을 다스리는데 있어 먼저 부하게 만들어야 한다. 사람은 그런 후에야 인과 의를 찾게 된다고 공자도 말했다. 방법론이 문제인 것이다.

관자 목민편에 보면 사람은 그 창고가 차야 예의를 알고 의식이 족하며 영욕을 알면 그제서야 위에서 법도를 지키며 백성들도 서로 화합한다는 글이 나온다. 매우 정확한 지적이다. 그러나 유가적이지는 않다. 공자·맹자의 학설에서 부족한 이론적이고 기술적인 면은 순자에 의해 보완되어졌다.

순자의 논리는 맹자보다 훨씬 정밀하고 설득적이다. 맹자는 변설이 주특기였고 때론 어거지 논리도 구사하였지만, 순자는 현실에서의 문제들에 대해 훨씬 더 깊고 광범위한 이론을 전개시켰다. 이러한 논리전개의 바탕은 성악설(性惡說)이다. 인간의 타고난 성(性)은 악(惡)하기에 교육을 통해 성현의 가르침을 배우고 예로써 본성을 극복하여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 순자의 성악설은 맹자의 성선설과의 이론 싸움에서 뒤지게 되고, 이후 맹자의 성선설이 유학의 정통으로 자리잡는다. 순자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은 악하기 때문에 성현의 가르침을 통해 예로써 극복해야 한다 하였다. 이에 맹자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럼 그 예로써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은 어디서 나온것인가 순자의 논리대로라면 성현은 인간이 아니냐는 논리로 반박하였다. 이러한 논쟁 이후 성은 악하다는 단정적인 결론만 제외한다면 맹자보다 정밀하고 기술적이고 논리정연한 순자의 학풍은 유학에서는 정통으로 나아가지는 못하게 되었다. 이제 오직 당위와 명분만이 현실에 대한 군자의 대처 방법이 된 것이다. 현실의 윤활유인 타협이나 절충은 군자가 경계할 바가 된 것이다. 극단적인 유교의 문화속 에서는 타협이나 절충은 지하로 혹은 꽁무니로 숨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문화는 그렇게 된 채 대대로 유전되어 내려간다.

晏子는 유생은 말재간꾼이니 상관하지 말고 거만하고 기회주의적이니 수하에 두지 말며 유세하고 녹을 빌어 먹게는 하되 나라를 다스리지는 못하게 해야한다 했다. 안자의 지적은 정확하였지만 일단 혼란이 수습되고 활통이 치워지게 되면 왕이된 사람의 마음은 달라지나보다.

유방이 항우를 무찌르고 한나라를 건국한 후 국가적 이념으로 채택된 것이 하필 현실주의자들이 경멸하던 유학이었다. 사기에 의하면 유학의 사상이 한나라의 통치이념으로 될때까지도 한고조는 떨떠름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일단 유교에 따르는 여러 가지 제도와 법식이 정해져 실행되자 유방의 입은 귀밑까지 찢어질 지경이었다. 그 말안듣고 말썽 많지만 생사고락을 같이하였고 아직 기반이 잡히지도 않았기에 무시할수도 없던 부하들이 얼마 안있어 줄줄히 길이 들여졌으니 말이다. 이후 유학의 관념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제도와 규칙들에 의해 한나라는 조직 되어졌다. 마침내 공자의 이상이 실현되게 된 것이다. 이후 유학의 사상은 한나라를 이어 당나라, 송나라를 거치며 국력과 더불어 주변국가로 퍼져나갔다. 인간관계에서의 풍부한 개인적인 수신제가론과 인간에 대한 변별론 등 기득권층에 의해 옹호될수 밖에 없는 유학의 사상은 주변국에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심지어 침략국까지도 그 속에 함몰시켜 버렸다. 물론 이러한 중국문화 특유의 흡수력은 유학의 사상에 의해서만은 아니다. 도가사상, 불교사상 등과 관습 그리고 중국인들 특유의 민족성 등이 전체적으로 어우러진 결과일 것이다.

일본은 유학의 사상에 영향 받은바 크지만 특이한 것은 일본은 과거제도와 사서삼경 중의 <예경(禮經)>은 수입하지 않았다 한다. 참으로 대단한 민족이다. 경쟁적으로 유학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티격태격했던 조선시대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정한 후에는 유교의 경전을 가장 잘 외우고 이해하고 활용하는 사람을 뽑는 시험 즉 과거 시험을 치루어 관리를 등용, 사람들을 통치하는 관료주의 체제가 두 민족을 중심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한국은 조선시대 이후임)

조선도 그러했지만 중국 역시 시간이 흐를수록 관료의 수는 늘어가고 이들은 또 하나의 커다란 기득권층이 되어 이미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지키려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더욱 얻으려 하였다. 그런가운데 관료들끼리는 암암리에 보편적인 정서가 형성되고, 그 정서로 뭉치며, 관료체계는 세월이 갈수록 강화되었다.

중국을 새로 통일한 왕조나 정복한 이민족도 이 체제만 건드리지 않고 잘 다루면 유학의 특성상 그리고 관료 각자가 스스로의 기득권과 생존을 위해 노력하며 모든 것은 잘 되어나갔다. - 조선 역시 중국과는 다르긴 하였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 그리하여 불과 십수만 명으로 중국을 정복한 여진족도 수백년씩 중국을 다스릴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을 정복했던 이민족들은 몽골을 제외하고는 알아서 잘 다스려 주는 관료체제 속에 묻혀 서서히 중국화 되어가다 수백년에 한 번씩 있던 격변중에 이리저리 뒤섞인후 마침내 민족도 나라도 없이 모두 자부심 강한 중국인이 되어버려왔다.

공자와 맹자 그리고 순자 이후 유학은 더 이상 발전할게 없어서인지 큰 발전을 못하게 되고 형이상학적인 면으로는 도교와 불교사상에 뒤쳐지게 된다. 그러다 천년을 더 지나 송나라에 와서 주렴계 때에 이르러 다시 꽃피우기 시작했다. 이는 주렴계의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는 주역 속의 태극(太極)에 대한 재해석으로 시작되었다. 아마 공자에 의해 또는 유가 중 누군가(아마 맹자가 가장 유력)에 의해 역유태극(易有太極)이라 하여 태극을 해설한 이래 천수백년만에 다시 태극이 거론하게 된 것이다.

이후 유학은 장횡거와 주렴계의 제자인 정이천, 정명도 형제가 유학의 이론을 발전시키고 뒤이어 나회암, 주희, 육상산, 왕양명 등으로 이어지며 이론, 윤리, 도덕, 교리적인면 외에 형이상학적이고 사상적인 면까지 다시 발전하게 되었다.

이들이 발전시킨 유학은 주희에 의해 공자이후 다시한번 집대성되었다. 이를 정주학 또는 주자학이라 한다. 이는 고려말 안향에 의해 도입되어 길재, 이색, 정몽주 등에 의해 연구되어졌다. (물론 이 이전에도 유학자가 있었다.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도 유학자였다) 이때가 고려말인데 아직 불교가 통치이념일 때였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에 의해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들어서며 유학은 새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채택되었다. 이후 조선의 유학도 조선 특유의 사상적, 이론적 발전을 하게 된다. 그러나 너무 주자학 일변도 였다. 조선 초에 이미 조한보와 이언적이 태극, 무극 논쟁을 한바있고, 16C에 들어 정지운(1509∼61)의 천명도설을 이퇴계가 수정을 가하고 이 수정에 대해 기대승이 반론을 제시하면서부터 성정이기에 관한 기나긴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사단칠정론이라 하는 성과 정에 대한 논쟁이다. 조선 나름대로의 유학의 발전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이율곡과 성혼간에도 이 논쟁은 다시 벌어졌었다. 성정론은 조선시대를 통해 갖가지 당리당략과 이해와 관계하며 파벌의 형성에도 한몫하게 된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는 공리공론을 일삼는 - 그럴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미 죽고 없는 공자와 맹자 그리고 주자가 정해놓은 말들을 두고 서로 자기만 옳게 해석하였다고 우겼으니 - 유학을 재구성하려는 움직임이 실학으로 나타나고 조선말의 이제마는 이러한 개신유학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유학의 발생배경과 조선에 유학이 도입되기 까지의 과정에 대해 미숙하지만 대략적으로 검토하여 보았다. 유학이 단지 중국적인 사상인 것이 아니라 우리 한국민족의 조상들과도 관련이 많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깊게 파들어가다 보니 다소 무리한 점도 지나친 점도 있었을 것이다.

유학의 사상을 책 몇페이지로 요약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필자 자신도 모르는 것이 많고 그나마 아는 것도 정밀하지 못하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글을 써본 것을 이책은 유학에 대한 책은 아니다라는 말로 변명하겠다. 사실 이책은 유학에 관한 책이 아니다 단지 이제마의 사상적인 면을 조금이나마 알아야겠기에 기본적인 유학에 관한 지식정도는 갖추어야 하지않겠냐는 생각에서 적어보았다. 단 이제부터 전개할 성정론에 관한 글은 본문의 이해를 위해 꼭 필요하다.

이제부터 동의수세보원의 보다 정밀한 이해를 위해 이제마의 사고에 큰 영향을 끼친 맹자, 주자의 성정에 관한 글과 조선 특유의 성정이기에 관한 글들을 미숙하고 미진하나마 적어보겠다.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은 필자는 이후 유학의 여러 이론중 어떤 것은 필자가 마음대로 판단하여 비평을 가하거나 해체시키고 재구성할 것이다. 그것의 원칙은 별거아니다. 종적인 유학의 이론을 흔들어 횡적인 것으로 재구성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조는 이미 이 단원의 처음부터 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필자의 독창적이고 독자적인 것이 아니다. 아주 옛날부터도 있어 왔던 것이다. 단지 시대가 다르고 그 시대에 따른 기호와 개념과 방법이 다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