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의 理氣론

이제부터의 理氣론은 조선시대의 이기론을 중심으로 써가려 한다. 우리나라의 국기인 태극기의 중심에 있는 붉은색과 푸른색은 음양을 나타내고 있다. 붉은색은 양, 푸른색은 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태극기를 음양기라고 하지 않는다. 이는 건곤감리의 작대기들 때문도 아니다.

의 모습은 음양이라고도 하지 않고, 음양이 서로 나아가고 물러서는 역동적인 모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태극이라고 말한다. 일단 태극이라는 기호로써 ' 인간의 생각 ' 의 혼돈을 진정시켜 놓았다. 그런데 왜 음양이 운동하는 모습을 처럼 그리게 되었을까? 태극의 그림에서 위의 반을 쪼개내어 보자.

「 치우기(蚩尤旗)는 꼬리별 혜성과 비슷하며, 뒤가 꼬부라져서 깃발을 닮았다. 깃발이 보이는 곳 바로 밑에 병란이 있다. 이는 치우천왕이 승천 별이 되신 때문이다. 」

- 한단고기 -

이 글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태극의 위그림태극의 빨간색 부분과 같은 모습이 될 것이다. 위와 같은 그림이 아래위로 맞물려지면 가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치우씨는 강(姜)씨의 조상이라(여자는 강(羌))하며, 창힐(한자를 만들었다는 인물), 고신(고신은 헌원의 자손이라고도 한다.고구려와 공자의 조상이라 말했었다), 강태공 모두 치우씨의 자손이라고 한다.] 태극의 빨간색 부분의 모습은 각 정당의 당기에도 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우리 나라 정당들은 항상 싸우는 것일까? (이들은 경제적으로는 어느 이익집단 보다도 똘똘 뭉쳐있기도하다.)

理와 氣를 하나로 합쳐보기도 둘로 나누어 보기도 하여야 한다는 말은 태극기의 그림을 나타내는 음양의 모습을 말로는 태극이라 부르며 음양으로 풀어 말하려는 경우와 같다.

「 주자는 천지 사이에는 理가 있고 氣가 있는데, 理라는 것은 형이상의 도요 생물의 근본이며, 氣란 것은 형이하의 器요 생물의 구체면이니, 이 까닭에 人과 物의 생은 반드시 이 理를 받은 뒤에 性이 있고, 반드시 氣를 받은 뒤에 형체가 있는 것인즉 그 性과 形(형)이 비록 일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道器 ,즉 형이상하간에 한계가 매우 분명해서 질서가 정연하다고 하여 이와 기의 不雜성을 드러내주고 있다. 」

- 퇴계의 생애와 사상

일단 理와 氣는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定義하여 놓고 있다. 건( ≡ )에 의해 物이 生하고 坤(땅 곤)에 의해 物(만물 물)이 형체를 갖추고 자라게 된다는 논법과 비슷하다. 이는 건이 없으면 곤도 그 형체를 나타낼 수 없고, 곤(坤)이 없으면 건도 그 物을 生할 바탕이 없기 때문이다. 반드시 건곤에 의해, 즉 음양에 의해 현재의 物이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현상이나 물질 등을 분석함에 있어 여러 가지 방법론이 있을 수 있지만, 건곤 즉 음양에 의해 분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의 음양은 음이 있기에 양이 있고, 양이 있기에 음이 있어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만, 그렇다고 음 따로 양 따로 있어 개별적인 음과 양이 서로 변증법적 모순으로 운동하는 것은 아니다. 기호론에서 말했듯 모든 것은 서로 속해있고 구별되어있기 때문이다.



A는 BCD에 B도 ACD에 D는 ABC에 의해 존재된다. 음양이기 역시 음에도 理가 있고, 氣가 있고, 양에도 그러하다. 理에도 음양이 있고, 氣에도 음양이 있기 때문이다.

이상이 음양론에서 말한 음양의 상대성이었다. 理 , 氣론 역시 그러하다.

理따로 氣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理가 있는 곳에 氣가 있고 氣가 있는 곳에 理가 있다.

「 理와 氣는 각각 따로따로 있을 수 없으면서도 二物이 一物되는데 방해되지 않고 비록 氣중에 있다 하더라도 서로 섞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반드시 양면으로 나누어 합쳐서 보기도 하고 떼어서 보기도 하여야 하는 것이다. 」

- 이퇴계 퇴계의 생애와 사상 中 -

앞서 理란 ' 결 ' 을 생각하라고 하였었다. 나무도 결을 가지고 있고, 돌도, 동물도, 땅도, 하늘도, 문화도, 역사도, 인간도, 정신도, 모든 것이 나름대로의 결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나의 거대한 흐름속에 있으며 그 흐름에 따르고 있고, 그 흐름에서 어긋나있지 않기에 지금 존재해 있는 것이다. 삼라만상 모든 것이 그 흐름에 속해있다. 가장 큰 우주와 가장 작은 미립자의 세계도 그 흐름속에 있다. 때문에 우주와 미립자도 아직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공통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을 것이며, 이에 따라 공통적인 결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결이 곧 태극이 理의 기본적인 개념이다. 이 理에 신의 형상을 부여하건 과학의 잣대를 들이대건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다.

그러나 설사 우주속의 모든 것이 하나의 공통된 속성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돌과 생물이, 동물과 사람이 같지는 않다. 모든 것은 서로 다르다. 전자를 보편자로서의 理라 한다면 후자의 말은 개별로서의 理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四象(사상)이기도 하다. 현실에서의 象은 계속 변화하고 있다. 저마다의 理속에있는 이러한 변화는 추적할 수 없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고 지금도 진행중인 상태이다. 애초에는 분별하기 힘든 미세한 변화도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미시적으로 나누어져 나가며 서로간에 더욱 분명해지고 오랜 시간 뒤에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띠게 된다. 이러한 차이는 氣에 의해 일어난다. 열대의 식물과 한 대의 식물은 분명 공통적인 면도 있지만 다른 면이 있다. 그러한 차이는 氣에 의해 일어난다. 그러한 기(氣)의 차이에 의한 변화는 마치 음과 양이 서로 꼬리를 물고 계속 일어나는 것처럼 시간을 따라 무한으로 변화해 왔고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개별로서의 理도 갖추게 된다.

잘라 낸 나무의 ' 결 ' 을 보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지금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氣가 운동한 모습이다. 氣가 그러한 운동을 한 까닭은 능동적인 힘을 가진 理에 있다는 것이 소위 主理론이며, 理에 능동적인 힘을 두지 않고 氣에 의해 그러한 운동을 분석하면 主氣론으로 흐르게 될 것이다.

조선에서의 태극과 理, 氣에 관한 논쟁은 이언적과 조한보에서 비롯되고, 이때 이후로 조선에서도 조선 나름대로의 이기(理氣)론이 생기게 된다. 이언적과 조한보의 논쟁은 무극과 태극에 관한 서로간의 견해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처음 무극을 말한 사람은 주렴계였다. 주렴계는 無極而太極(무극이태극)이라고 말하였다. 무극과 태극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하였었다. 이때 말했던 무극과 태극간의 관계는 필자 나름대로의 견해일 뿐임을 다시 밝혀 둔다. 필히 다른 사람들의 글들도 읽어 편견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조한보는 첫째 ' 무극이 태극 ' 에서 무극은 無이며 內적인 것이고, 태극은 有이며 外적인 것으로 나눌 수 없고, 둘째 ' 무극이 태극 ' 은 큰 근본이자 통달한 도로써 나눌 수 없는 한 덩어리이기 때문에 그 근본만 깨달으면 모든 사물의 이치를 다 갖추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

- 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 中 -

처음 이런 글을 접하는 사람은 그렇다 치고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책을 쓰며 이런 글을 여러 차례 접해본 사람도 도무지 황당무계하게 생각되는 글이다. 다만 직관적으로 무극은 무엇이고 태극은 무엇인가가 어렴풋이 감을 잡을 수 있기는 할 것이다. 조한보에 비해 이언적의 글은 논리적이다. 이언적은

「 첫째 理는 지극히 높고, 묘한 것 같지만 그 참모습이 깃든 곳에서 찾는다면 지극히 가까운 실상속에 들어있다. 그러므로 그 근본자리를 둘로 나눌 수는 없지만 체용, 동정, 선후, 본말을 구별하지 않을 수 없으며, 둘째 理는 지극히 높고 지극히 묘하면서도 우리 주변의 구체적인 것들 속에 원리로써 들어 있다. 또한 만물이 생겨나기 전부터 있었으면서 만물이 다 없어지더라도 없어지지 않는 영원불멸의 존재이다. 」

- 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 中 예문서원

고 말하였다.

어떤 이는 조한보의 견해에 더 타당성을 두고 어떤 이는 이언적의 견해가 더 이해되기 쉬울 것이다. 왜 그럴까? 아니 그렇지 않은 것일까? 어느 한사람만 옳다면 논쟁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세계도 인생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들의 논쟁에서 이황은 이언적의 손을 들어준 것 같다. 이황은 理에 대해

" 알기가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실은 쉽다. 대개 천하에 마땅히 행해야 할 바가 理요, 마땅히 행해서 안될 바는 非理니 이것으로 추측하면 理의 실재를 알 수 있다. 일에는 대소가 있으나 理에는 대소가 없다. 놓아서 바깥이 없는 것도 理요, 거두어서 안이 없는 것도 理다. "

고 말하고 있다. 또 아래와 같이도 말하였다.

" 理는 귀(貴)하고 氣는 천(賤)하다."

마치 계사전에 나와있는 ' 하늘은 귀하고 땅은 천하다 ' 라는 논리가 생각나는 글이다. 이황은 윤리, 도덕적인 가치에서 理를 매우 중요시 생각한 사람이다. 이언적에게서 이황으로 오면서 理는 주자와 이언적의 견해 위에 초월적이고, 창조적이며, 종교에서의 절대자적인 성격까지 띠게 된다. 이황은 氣는 理에 의해 생긴다는 생각으로까지 나아간다. 쉽게 말해 이런 생각이 확대되면 당신 앞에 일어나는 현상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 된다. 지금 거리에 나가 길을 걷다 어떤 사람과 어깨를 부딪친다 하자. 그 부딪침은 필연일까? 우연일까? 우연과 필연일까? 우연도 필연도 아닐까? 그것에 대해서는 보고 그냥 지나쳐 버려야 할까?

이황이 말하는 理의 실제적인 성격은 어떤 현상에 대해 누군가의 ' 의지 ' 가 담겨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황이 ' 理는 귀하고 氣는 천하다 ' 한 것도 마치 공자나 맹자처럼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 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태극이 단순한 음양의 작용일 뿐이라면 잘 쳐야 과학밖에는 안될 것이다기 때문이다. 역사를 음양의 작용을 통해 보려 한다면 정글의 법칙이나 손자병법, 유물론적 역사분석 등밖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현대의 시각으로야 얼마든지 다르게 다룰 수 있겠지만 이 당시는 주자학 일색이던 조선시대였다. 유학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수용하게되면 이황처럼 말했을 것이다. 귀하고 천한 것은 소위 군자가 일련의 상황이나 상태속에서 시비, 가치판단의 기준을 제시하여 주는 것이었다.

한국이나, 중국에서 군자, 신사, 요조숙녀 등으로 표현되는 단어들이 갖는 개념은 어느시대건 그 시대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에 있어서의 표준을 제시하여 주어왔다. 어느 시대이건 사람들은 그 시대의 영웅, 우상을 본뜨고 모방하려 들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이 귀천을 가리는 버릇은 불가피하게 다른것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양은 귀하고 음은 천하다고 정해지면 그에 따라 양과 음에 소속되어 있던 개념들이 덩달아서 함께 취급될 수 있는 것이다. 즉 남자는 귀하고 여자는 천하며, 양반은 귀하고 상민은 천하며, 하늘을 귀하고 땅은 천하며, 이상은 귀하고 현실은 천하다는 식이다. 그러나 원래 말한 이의 의도야 어찌되었건 그들이 말한 내용들이 파급시키는 결과에선 갖가지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어있다.

음양은 서로 상대적인 것의 관계속에서 현상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음양에는 생각이 없다. 신(神)이 하든 누가 하든 어쨌든 생각은 사람이 할 것이다. 그러나 ' 양은 귀하고 음은 천하다 ' 식으로 해석하면 음양은 음양론이 아니고 음양사상이 될 것이다. 음양론이 음양사상적인 면으로 흐르면 음양론이 가지고 있는 자연 과학적인 개념과 귀천의 관념이 가지고 있는 철학적, 윤리적, 도덕적... 등등의 면이 필연적으로 모순속에 갈등을 겪을 것이다. 이런 점은 氣와 理의 개념을 정의하여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될 경우 이번에는 당연히 현실과 이상은 서로 일치될 수 없는 까닭에 도가주의의 초월 사상이나 , 니체식의 허무주의적인 관념이 생기게 될 것이다. 이러기에 理와 氣는 하나로 보기도, 둘로 나누어 보기도 해야 할 것이라는 논리가 필요로 되어지고 理에 중점을 둘 것이냐, 氣에 중점을 두어야 하냐는 主理, 主氣론이 생기게 된다. 그러자 이번엔 " 어디까지, 어느정도까지 " , " 어떻게 " 가 문제로 떠오르게 된다.

발이 없는 기호의 끝없는 필요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점은 시간과 인간의 측면에서 보아도 그러하다. 어느때건 그 시대의 인간은 그 시대의 문제속에서 계속 옛 해석을 재해석 할 것이며, 그 인간만의 문제가 당연히 있게 되어있다. 인간에게는 끝없는 의문과 관계설정의 과제가 있게 된다. 이 경우 불교나 도가적인 직관을 깨닫는 것이 가장 단순하고 분명한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나, 그러한 당위론 역시 너무 공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