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단 또한 외부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은 칠정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사단은 리가 발하여 기(氣)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氣)가 발하여 리(理)가 타는 것이다. 」

- 이 퇴 계 -

이른바 理發氣隨(이발기수), 氣發理乘(기발이승)의 논리이다. 처음 이발기발에서 기고봉과의 지리한 논쟁을 거치며 이발기수 기발이승의 이론이 만들어진 것이다. 따른다 수(隨), 탄다(乘) 또 새로운 기호가 나왔다.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리발기수, 기발리승은 모두 理의 순수성을 살리고자 하는 이황의 신념이 담긴 글이다. 리발기수는 외계의 현상에 접할 때 사단의 순수한 마음인 性이 우선 자극되고 반응되어 칠정의 감정이 악으로 흐르지 않고 따라 나타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기발리승은 같은 상황에서 칠정이 먼저 자극되고 반응되는데 칠정 또한 理이지만 氣의 작용이 크다는 것이다. 어려운 말 같지만 쉽다. 좁은 골목길에서 두 대의 자동차가 서로 양쪽 골목길에서 들어서 직진하다 마주서게 되었다 하자. 이때 당신의 마음속에서는 먼저 양보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가? 시비를 가리고자 할 것인가? 화부터 먼저 내는가? 공적인 일을 두고 누군가 잘 부탁한다며 촌지를 건넬 때 당신은 기쁘겠는가? 본연의 임무를 생각하겠는가?

이퇴계와 기고봉간의 논쟁은 " 무엇이냐 " 는 논쟁이라고 생각한다. 본체론이나 본질론 등이라 말할 수 있는 本에 관한 논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단칠정의 本에 대한 논쟁은 이후 수백년을 더 이어져 갔다. "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 , "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 , "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 등등에 관해서는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른바 현실에 없는 本에 관한 논쟁은 공리공론 탁상공론일 뿐이었다. 외부의 새로운 사상이나 문화에 접하지 못한채 중국에서 전래된 정주학에만 의존해 이처럼 수백년에 걸쳐 소모적으로 하나의 논리를 깊게 파고들어가는 경우도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드물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불가피하게도 여러 가지 새로운 논리들이 만들어진 것도 또한 사실이다. 때문에 백해무익이나 무해무익의 논쟁은 아니었다. 오늘날의 중요한 것은 그렇게 깊게까지 들어간 논리들을 어떻게 배우고 활용하느냐 일 것이다. 퇴계의 리발기수, 기발리승에 대해서는 후에 율곡이 리발기수, 기발리승은 이치와 기운 두 가지가 혹은 먼저하고 혹은 뒤에하여 서로 맞서서 두 갈래가 되어 각각 스스로 나오는 것이니 인심의 바탕이 둘이 되는게 아니냐며 비평을 가하였다.

맹자가 정의한 ' 성선 ' 의 틀내에서의 논쟁의 과정 중 여러가지 조선나름의 특징적인 논리와 개념들도 새로 생겨났다. 본연의 성품이니 본연의 기질이니, 리발기수 기발리승, 인설과 대설, 횡설과 종설, 이율곡의 리통기국 이론도 만들어졌었다. 이퇴계와 기고봉간의 논쟁은 퇴계의 나이도 있고 해서인지 아직까지의 한국사회가 그런 것처럼 너무 끝까지 파고들다 지쳐서인지, 발가락이 닮았다는 논쟁처럼 좋은게 좋다는 식으로 덕담으로 끝맺음 하였다.

이퇴계와 기고봉간의 논쟁은 성과 정에 관해 논할 때 이와 기를 나누어 보자니 인간의 마음이 두 가지의 모순된 마음으로 나누어지고, 그렇다고 하나로 보자니 인간의 마음에 선천적으로 악한면도 있다는 성선의 틀에 어긋나는 모순이 있는 것이 원인이었을 것 같다. 판단을 할 때의 기준의 잣대가 과학이 아니고 유학인 까닭에 서로간에 실증할 수 없는 논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사람이 선하다는 것은 유학에서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 갈 진리이다. 그리하여 정이란 선을 하는 것이란 맹자의 말은 앞으로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정언적 명령이라 할 수 있다.

성과 정에 관한 논쟁은 이율곡과 성혼간에 다시한번 이루어지며 인심도심 논쟁으로 나아가게 되고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계속되어 나간다. 이들 이전에도 서화담처럼 氣론자도 있었고, 허균처럼 인간의 본성속에 성욕같은 것을 포함시켜 생각했던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워낙 퇴계와 율곡이 만든 그늘이 컸었기에 크고 색다른 논쟁은 없었다.

이이와 성혼간에도 퇴계와 고봉간의 논쟁과 비슷한 논쟁이 있었다. 성혼간의 논쟁과정에서 이이는 리통기국을 말하였는데 이는 아래와 같은 말이다.

「 이치와 기운은 원래 서로 떨어지지 못하므로 한 물건 같지만 그것이 서로 다른 까닭은 이치는 얼굴이 없고 기운은 얼굴이 있으며 이치는 함이 없고 기운은 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약하여 말해보면 理는 법칙 원리 氣는 현상, 결과, 상태이기 때문) 理는 얼굴이 없고, 氣는 얼굴이 있기 때문에 理는 통하고(理通), 氣는 국한된다(氣局)고 하는 것입니다. 」

- 이 율 곡 答成浩原 -

「 理通이란? 理란 근본도 끝도 없고 먼저도 나중도 없는 것입니다. 근본도 끝도 먼저도 나중도 없기 때문에 아직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먼저가 아니고, 이미 반응하여 나타나 있는 것이 나중이 아닙니다. 기운이 치우지면 이치도 또한 치우치나 치우친 것은 理가 아니고 氣 입니다. 氣가 온전하면 理도 또한 온전하나 온전한 것은 理가 아니고 氣입니다. 각각 그 성품이 되어 본연의 묘리가 그러함을 해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理通입니다. 氣局은 기는 形跡과 관계하고 있기에 근본과 끝이 있고 먼저와 나중이 있습니다. 기운의 근본은 湛一淸虛함 뿐이니 어찌 일찍이 찌꺼기나 재나 거름이나 똥같은 것에 기운이 있겠습니까? 다만 그것이 오르내리고 흩날려 잠시도 그치지 않는지라 서로 차이가 생기고 같지 않아 만가지 변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운이 흘러다니는 것이 그 본연을 잃은 것도 있고, 잃지 않은 것도 있게 됩니다. 이미 그 본연을 잃으면 기운의 본연은 벌써 없습니다. 치우친 것은 치우친 기운으로 온전한 기운이 아니며 맑다는 것은 맑은 기운으로 흐린기운이 아니며 찌꺼기와 재는 찌꺼기와 재의 기운으로 담일청허한 기운이 아닙니다. 이것이 이른바 氣局입니다. 」

- 율곡의 사상 中 -

理는 두루두루 서로 통하고 있는 것이고, 氣는 개별자로써의 특징이 나타나있는 것으로 생각하자. 이런 생각은 모든 것은 태극속에서 태극의 이치속에 있기에 한낮 미생물까지도 태극이다는 논리와 같다. 太極은 理, 理가 곧 太極인 것이다. 이율곡은 氣에 중점을 두었지만 氣론자는 아니었다. 이율곡같은 성현이 氣론을 주장하게 되어 氣론도 발전하지 못한 것이 아쉬운 점이다.

氣론으로 보면 하나의 거대한 우주에서 가장 작은 미립자나 미생물까지도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이 氣의 작용이기에 太極은 氣이다. 理는 氣의 법칙정도일 것이며, 그 법칙을 진리라 할 수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理론으로 보면 모든 物에는 그 생겨난 理가 있기에 생겨난 것이라 말할 것이다. 진리는 인간이 기호를 이용, 정한 것이기에 제한적이고 상대적일 수 밖에 없다.

氣론의 관점으로 보면 理는 상대적이 될 수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절대적인 것이 된다. 때문에 태극을 理라 하면 타협과 상호 토론의 여지가 없지만 氣라하여 理를 논할때는 토론, 대화, 새로운 의미창출이 중요하다. 모든 理는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토론과 대화의 기술적인 측면과 상호간의 논쟁을 통해 발전된 서로의 개념을 만들어 그러한 가운데 성숙된 문화를 이루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태극을 理라 하건 氣라 하건 토론과 대화로 닫혀져 있는, 모르고 있는 서로간에 Communication이 효과적이고 민주적으로 이루어지는 문화적 풍토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런 것이 理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리통기국에 대해서는 다음처럼도 말하였다.

「 사람의 性이 사물의 性이 아님을 氣의 局이요, 사람의 理가 곧 사물의 理임은 理의 通이다. 모나고 둥근 그릇은 다르나, 그릇안의 물은 동일하고 크고 작은 병은 다르나, 병안의 공기는 동일하다. 기의 一本이란 理通때문이고 理의 萬殊란 氣局 때문이다. 」

- 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 中, 이이 율곡전서 -

불교에서 말하는 집일함삼, 함삼귀일도 이와 비슷한 관념에서 생긴 명제일 것이다.



사상의 관계에서 볼 때 B는 A와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C와 D는 A나 B에 있어 상대적이 아니기에 C는 A에도 속할 수 있고 B에도 속할 수 있다. D또한 A에도 속할 수 있고 B에도 속할 수 있다. 율곡이 말하는 理通은 보편성을, 氣局은 특수성을 말할 수도 있다. 이 관계를 사상에 적용해 보자



사상의 논리대로라면 理에도 보편과 특수가 있고, 氣에도 보편과 특수가 있 으며, 보편으로 리(理)와기(氣)를 다룰 수 있고 리(理),기(氣)에도 특수가 있다. 또한 C와 D에 사용되는 단어들은 A, B어디에도 속할 수 있다. A에게 있어 그리고 B 게 있어 C와 D는 야누스의 얼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마 그래서 논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논리가 무용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이점은 C와 D에 있어 AB도 그러하다.

이상으로 이 책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적은 유학에 관한 내용을 마치고자 한다. 유학의 내용은 매우 방대하고 필자는 책몇권을 읽었을 뿐이다. 그러고도 이렇게 아는척을 하고 있다니 그 뻔뻔함이 놀라울 것이다. 이제까지의 이기성정론 역시 아직 잘 모르는 것으로 인한 오해와 오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애써 읽어주었고 더 정확히 알고 계신분은 비평을 하여주길 바란다. 특히 필자의 어설픈 사상론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주기 바란다. 끝으로 리기성정(理氣性情)에 관해 주자와 이황, 기고봉과 이이의 견해를 정리하여 보았다.

주희는 현상세계에 대한 객관적 해석을 끌어내려는 입장에서 理氣의 동정을 규정했다기 보다는 도덕적 가치를 중시하는 입장에서 理를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황은 性과 理를 관련시키며 더욱 理를 순수한 가치를 가진 것으로 해석하려 했었다. 인간은 매일을 순간순간마다 크고 작은 판단을 하며 살고 있다. 이때 인간은 무엇엔가에 근거를 두고 현상을 인식하고 주관적, 객관적인 가치판단도 한다. 현상과 접하여 순간적으로 어떠하다는 판단을 내리거나 묵살하거나 하는 생각이 이루어지는 것을 ' 가이 ' 라 하겠다고 하였었다. 가이는 잠재된 의식, 무의식에서 의식이 되는 과정이자 순간이다. 기준 판단에 방향을 설정하여 주는것, 그것은 그 인간의 미래일 것이다. 앞날에의 예측이 인간이 행하여야 할 것, 가야 할 길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은 개인적인 환경, 주변 여건, 경험 등과 맞물리어 분명 지극히 주관적인 성격을 갖고 있을 것이다. 가이는 이 기준이 이루어지는 상태이기도 하다. 인간이 변화하는 현상 속에서 갖가지 감정과 이해 관계에 얽매이게 될 때 무질서와 혼란을 정리하는 ' 가이 ' 는 이루어지기 힘들게 될 것이다. 이황은 이런 점을 걱정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한다. 그리하여 보편적 기준으로 理를 선정하여 하나의 전 사회적인 통념을 만들고자 했던 것 같다. 노후에도 불구하고 기고봉과의 8년간에 걸친 힘겨운 논쟁에서도 끝까지 理의 순수한 가치를 지키고자 했던것도 위와 같은 의도였을 것 같다.

주희는 보편적인 도덕적 가치로써 理를 강조했고,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점수식으로 끊임없는 배움을 통해 理에 접근하려 했고, 논리적 진리보다는 규범적이고 당위적인 가치를 우선시 했는데, 이점은 이황에게서도 그러하다. 이황은 理를 종교적인 차원으로까지 높이려 하였다. 이황에게 있어 理란 도덕적인 기준이자 원칙인 것이다. 서로 잡다하게 다른 생각을 가진 인간들이 사회속에서 모두가 동의하고 따를 수 있는 보편적이고 도덕적인 기준으로써 理를 강조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고봉과 이이는 이와 생각이 다름은 이제까지 말해 온 바이다. 그러나 理를 중요시하는 것 까지 다르지는 않다. 또한 이들이라고 선을 이루기 위한 이상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다만 논쟁의 주안점이 인위적인 진리가 아니라 정밀한 본체론을 세우기 위한 것이였으리라 생각한다. 기고봉의 견해는 앞에서 많이 말하였기에 여기에는 이이의 글을 적어보겠다.

「 천리가 사람에게 부여된 것을 性이라 하고, 성과 기를 합하여 한몸의 주재가 된 것을 心이라 하며, 心이 사물에 응하여 밖으로 발동하는 것을 情이라한다. 이때 性은 心의 체가 되고, 情은 心의 用이 된다. 心은 이미 발한 것과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을 합하여 말하는 것으로써 心이 性과 情을 통섭한다. 」

- 이이 인심도심설 -

心을 이황보다는 강조하였지만 그렇다고 心則理하여 양명학이라 할 수도 없다. 사단칠정의 논쟁중에 이황은 기고봉에 대해 자꾸만 하나로 종합하려 하지 말고 구분지어 볼 것을 충고하고 있다. 성혼과 이이와의 논쟁에서도 성혼은 이이에게 자꾸만 급하게 하나로 일치시키며 하지 말 것을 수 차례 당부하고 이이는 자신의 경솔한 성격 탓으로 그 탓을 돌리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주희는 육구연과의 논쟁에서 평하길 육구연의 제자중엔 실천적인 인물이 많다고 하고 있다. 공통점이 있다면 心이나 氣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성격이 급하며 행동적인 면이 상대적으로 사색적인 면보다 많음을 알 수 있다. 극단적인 氣론자 일 수 있는 ' 허균 ' 은 매우 행동이 앞서는 인물이었다. 급한성격과 상대적인 행동의 빠름사이에 어떤 필연적인 연결성이 있는지는 모른다. 때문에 일단 지나친 비약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일 벌써 음인과 양인과 理를 중요시하는 사람과 氣를 중요시하는 사람을 연관시켜 생각했다면 그사람 역시 상당히 빠른 생각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급한 마음과 빠른 생각과 행동, 느린 마음과 차분한 생각과 관조적 자세 더 자세한 것은 이 책을 끝까지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상인중 태양인은 화급한 성격을 소양인은 성급한 성격을 갖고 있다. 양인은 단순하고 화끈한 대신 원칙도 지조가 없고 말과 행동을 신용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태음인은 좀 느린면이 있고 급한 면보다는 느긋한 성격이 주로 나타난다. 소음인은 조용하고 침착한 편이지만 태음인 만큼 느긋한 면은 덜 나타나고, 조급한 면을 좀더 보이는 편이다. 대신 생각할 때는 일단 양보하고 내주고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하는 편이다. 태음인은 상대가 하는데로 내버려두는 편이다. 좋게 말하면 신중하고 침착하다 할 수 있고, 나쁘게 말하면 음흉하고 속을 알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사상인의 성격적 특징중 이런면은 性일까? 情일까? 이런 것이 기질일까? 왜 이이나 기고봉은 性과 情을 자꾸만 하나로 종합시키려 하였을까? 실제 그것이 그렇다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황이나 성혼, 주자는 그르다는 것일까? 그렇지도 않다면 서로 상대적인 두 의견이 모두 옳은 것일까? 그럼으로써 변증법적인 논리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일까? 어째서 이조 500년을 통해 내노라하는 두 학자가 상반된 입장을 가지고 있었을까? 물론 이들의 견해의 차이를 성격이 급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그래서 행동형과 관조형으로 분류하여 놓을 수는 없다. 다만 의문을 품어 보는 것은 큰 무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