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하학은철렌즈와같은불장난은아닐런지유클리드는사망해
버린오늘유클리드의초점(焦點)은도처에있어서인문(人文)의
뇌수(腦髓)를마른풀과같이소각(燒却)하는수렴작용을나
열(羅列)하는것에의하여최대의수렴작용을재촉하는위험을
재촉한다.사람은절망하라,사람은탄생하라 사람은 절망하라, 사람은 탄생하라. 」

- 이 상 선에 관한 각서中 -

필자는 서양의 모든 철학자는 유클리드의 엄격한 정의(定議)와 증명논리에 빠져있다고 생각한다.

완벽한 증명은 " 태극은 태극이다. " 로 말하는 우스꽝스러운 형태를 가질 것이다. " 태극은 理다. 라는 형이상학적 명제를 완벽하게 증명하기 위해서는 뇌수가 다 타버려 버릴 것이다. 인간이 선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우주와 하늘, 신의 이름까지 동원할 필요가 있을까?

맹자의 성선설을 마르고 닳도록 외쳐댄 조선은 과연 선에 의해 통치된 국가였을까? 그냥 분별있고 소박한 마음하나로 일생을 사는 사람이 머리가 터져라 선에 대해 배운 사람보다 낫지는 않을까? 물론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즉자적인 ' 나 ' 가 그러해야 할 것이지 타인간의 관계에 까지 적용될 수는 없다. 우리는 서로 타인들 속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속에서는 당연히 기술적인 측면이 요구된다. 시경에 ' 도끼질을 하는데 그 방법이 쉽지 않다 ' 는 글이 나온다. 바로 그런 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에는 60% 어둡고, 20.35% 어둡다. 30% 뜨겁다. 30% 밝고, 43.235267% 밝다. 35% 나쁘고, 66.776235% 선하다 하는 식의 표현이 없다. 일단은 어두움은 100% 까만 어둠을 말하고 나쁨은 100% 나쁨을 말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런 경우는 별로 아니 거의 없다. 그러나 어쨌건 우리가 쓰는 단어는 100 %의 구별성을 가지고 있고 가져야 한다. A와 B의 같은점이 99%만돼도 우리는 나머지 1%에서 혼란을 겪을 것이다. 공자는 다홍이 싫은 것은 그것이 붉은색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였었다. 이런점이 모든 인간이 겪어야 하는 딜레마일 것이다. 모든 단어는 각기 나타내는 것이있다. 이런 상태를 단어는 서로 구별되어져 있고, 그 극에 있다고 말하였었다.



하나의 원을 생각하면 원의 선둘레가 단어에 해당하고, 그러한 상태에서 서로 다른 단어인 태극과 그 중심은 理를 끄집어내어 그 쓰임새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런 상태에서 태극은 理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임에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 태어나는 사람들은 항상 아무것도 모른채 태어나 살아가며 의문을 가질 것이고, 그 의문은 지나간 시절의 이론으로는 지금 그들이 사는 시대의 의문을 적절히 해소시켜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현재 발생하는 일에 대해서는 선례를 찾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모든 현상들은 아파트처럼 누가 만들어 놓으면 들어가 살기만하면 되는 것도 아니다. 결국 인간들은 포퍼가 말한 ' 시행과 착오 ' 를 겪으며 그 시대를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황은 理에 대해 주자와 그 의견이 거의 비슷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황은 理에 대해 능동적인, 자발적인 성격까지 포함시켰다. 음양은 동정운동을 하고 태극인 理는 동정운동 하게끔 해준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율곡은 다르게 생각한다.

발하는 것은 기운이요, 발하게 되는 까닭은 이치다.

기운이 아니면 발할 수 없고, 이치가 아니면 발하게 되지 않는다.

- 이 율 곡 -

율곡은 성인이 태어나도 이 말은 고칠 수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하였다.

율곡은 理를 동정운동을 하는 까닭이라고만 보고 있다. 그 까닭을 밝혀내면 이른바 ' 진리 ' 또는 ' 법칙 ' 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대체로 동양학에는 이러한 직관(Intuition)적이거나 은유적인 언어표현이 많다. 올바로 해석하면 좋겠는데 필자는 ' 가섭 ' 처럼 이심전심(以心傳心)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저 수많은 가능논리 중 하나를 말할 뿐이다. 성혼과의 편지 문답중에 이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대저 이치란 기운을 맡게되고 기운이란 이치가 타는 것입니다.

이치가 아니면 기운이 바탕할 곳이 없고 기운이 아니면 이치가 의지해 붙을 곳이 없 습니다.

이미 두 물건이 아니요, 또 한 물건도 아닙니다. 한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이면 서 둘이요, 두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

- 율곡의 사상 中 -

이건 또 무슨 말일까? 그냥 주자나 이황처럼 하나로 합쳐보기도 둘로 나누어 보기도 - 주자 - 한다거나, 하나이되 서로 섞여 있지 않고 둘이 되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 이황 - 고 해도 될 것을 二物도 一物도, 一物도 二物도 아니라니 1.5 란 말인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여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조선 시대 최고 학자의 말이다.

「 한물건이 아니란 것은 이치와 기운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지만 묘하게 합해진 가운데 이치는 스스로 이치요 기운은 스스로 기운일지라도 서로 섞이지 않기 때문에 한 물건이 아닙니다.

두 물건이 아니란 것은 무슨말입니까? 비록 이치는 스스로 이치요, 기운은 스스로 기운이지만 완전히 한 덩어리로 앞뒤도 없고 떨어졌다 합쳤다 하는 일도 없이 그것이 두 물건인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에 두 물건이 아닙니다. 이치에 처음이 없기 때문에 기운에도 처음이 없습니다. 이치는 하나뿐입니다. 이치는 비록 하나이지만 기운에 의해 만가지로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 차이가 있는 것은 기운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만물의 이치가 곧 우리 사람의 이치니 이것이 이른바 모두가 한 태극을 몸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치가 하나라고는 하지만 사람의 성품이 만물의 성품이 아니요, 개의 성품이 소의 성품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성품을 각각 하나씩 가졌다는 것입니다. 」

- 이 율 곡 -

더 이상 어떻게 요약할 수가 없다. 이황이나 이율곡이나 다 그 말이 그 말 같을 것이다. 그러나 이황은 理와 氣를 둘로 보고 있고, 이이는 하나로 보고 있다. 다만 쓰임새에서 서로 섞여 있을 뿐이다. 좀더 세밀히 말해보면, 이황은 하나에서 둘로 분열하고 있고, 이이는 둘에서 하나로 종합하고 있음을 추리하여 볼 수 있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오류추리 중에 " 동굴의 우상 "이 있다. 이것은 개개의 특수한 인간이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편견에서 나오는 오류추리를 말하는 것이다.

" 어떤 사람은 옛것을 지극히 찬양하고, 어떤 사람은 신기한 것을 무한정 받아들인다. 단지 소수의 사람만이 공정함을 유지하여 고대인이 정당하게 확립해 놓은 것을 파괴하지도 않고 올바른 혁신을 경멸하지도 않는다. "

- 프란시스 베이컨 -

옛것을 찬양만 하려는 사람이나 신기한 것을 무한정 받아들이기만 하려는 사람은 동굴의 우상에 속한다는 말이다. 칸트의 교실에는 천재와 바보는 없었다고 한다. ' 천재는 더 가르칠 것이 없고, 바보는 가르쳐도 소용없어서 ' 라고 했다 한다. 필자 역시 보통사람의 능력으로써 보통사람을 위하여 이 글을 쓰고 있다.

수재나 천재에게는 능력이 못 미치고, 바보는 답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사실은 바보인 천재들이 너무 많은 것이 위안이 되기도 한다. 베이컨이 말한 소수의 사람들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소수에 속하고 싶지만 대부분은 옛것을 지극히 찬양하거나 새로운 것을 무한정 받아들이는 부류에 속할 것이다. 필자가 말하려는 것은 단순히 이러한 현상만은 아니다. 분명 무한정 옛것을 찬양하는 사람에게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있고, 새롭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옛것을 지키고 따르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선한 사람에게도 악에의 충동이 있고, 악한 사람에게도 선에의 마음이 있는 것과 같다.

인간의 정신 활동에 대해 몇 가지로 말해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분명 활동하려하고 또 휴식을 취하려 하며, 한참 휴식을 취하게 되면 다시 활동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이러한 가정에서 정신은 통일되어 있으면 분열되려하고 - 또는 하려 - 분열되어 있으면 통일시키려 - 또는 하려 혹, 되려 - 한다고 함부로 말해도 될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정신 속에서도 끊임없이 음양의 상대적인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의 가설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제 - - → ━ 는 분열된 정신에서 통일 또는 종합으로 가려는 정신의 상태 혹 마음의 상태이고 ━ → - - 는 통일된 또는 종합된 상태에서 분열을 확대로 가는 것이라는 설명도 말이 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단 그것이 행동일지 사고작용 일지는 정할 수 없다.)

지금 우리 정신이 " ━ " 의 상태는 전에는 분열되어 있던 것이 현재는 종합되어 있는 상태이며 이 상태는 고정된 게 아니라 끊임없이 운동중에 있고 언젠가는 " - - " 의 상태로 나아가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은 시간을 따라 흘러간다. 지금 " ━ " 의 상태는 " - - " 로 향하고, " - - "의 상태는 " ━ " 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일단 어느 한가지 상태가 된후에는 다시 " - - " 는 " ━ " 로, " ━ " 는 " - - " 로 향한다. ━ → - - 의 상태는 분열하려 하는 것이고, - - → ━ 의 상태는 하나로 모으려는 상태다.

이황이 기고봉과의 성정논쟁에서 이런 말을 하였었다.

" 당신은 자꾸 종합하려하고 있고, 나는 분석하려 한다. "

기고봉은 이황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다.

" 선생은 종을 말하고 있고, 나는 횡을 말하고 있습니다. "

( * 이황과 기고봉간에 벌어진 성정논쟁은 곧이어 나온다.)

어차피 논쟁은 상대적인 견해를 갖고 있기에 벌어지게 되어 있다. 이런 상황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편은 자꾸만 빨리 종합하여 행동에 나서려하고 있고, 한편은 일단 행동을 이루고 분석하여 놓으려 할 때 생길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 정신이 " ━ " 를 지향하는 것은 즉각적으로 행동하려는 인물의 사고행위 또는 정신상태이고, " - - " 를 지향하는 것을 일단은 사고하려는 사람의 정신상태라고 한다면, 억측과 독단과 비약이 너무 심한 것이 될까? 이러한 것은 이렇게 의문으로 남겨 두겠다.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이 책을 끝까지 읽어봐야 스스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음과 양의 특징중에 이런 것이 있다. 음은 무거워 내려오고, 양은 가벼워 떠오르는 성질이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땅은 음이고, 하늘은 양이라 한다. 혹 음이 쌓여 땅이되고, 양이 뭉쳐 하늘이 된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음과 양의 경계지점은 어디일까? 땅의 표면일까? 이것은 음양론을 모순적인 것 또는 이분법적인 운동으로 볼 때 쉽게 빠지게 되는 가능논리라 할 수 있다. 음양은 상대적인 것이다. 어느 부분에서든지 상대적인 음양이 있다. 그런데 그리하게 되면 이번에는 정해진 기준이 없이 매번 경우에 따라 기준을 만들어야 하는 무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원칙 내지 개요는 있다. 음은 흡수하고 축소하고, 양은 발산하고 확대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지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과학, 철학의 논리가 활용 되어질 수 있다. 이번엔 음양을 사상으로 한 번 더 분석하여 원의 그림을 가져다 생각하여 보자.

 

그것은 ①, ②, ③, ④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①과 ②를 한묶음 ③과 ④를 한묶음 할 수 있다. 그림 A, 그림 B는 축소와 확대를 그려본 것이다. 필자는 우리의 육체와 마음역시 이러하다고 생각한다. A 만으로도 B만으로도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일 A의 운동만 있다면 육체는 끝없이 축소되어가다 미립자보다 더 작은 한 점이 되어 버릴 것이다. 만일 B의 운동만 있다면 육체는 잠시도 멈춤이 없이 계속 움직이거나 허공중에 흩어져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육체는 A와 B 로 설명한 氣의 운동이 서로 자극하고 억제하며 어쨌든 현재 살아있어 균형이라 부르는 상태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서도 이러한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불가항력적인 위험 앞에서는 물러서고 싶고, 다칠까 도망가고 싶기도 하고, 용감하게 나서고 싶기도, 멋있게 물리치고 싶기도 하는 것이다. 그림 A는 축적하고 모으는 마음이고, 그림 B는 흩어지고 축적된 것이 퍼져 나가는 마음의 모습을 비유한다. 육체 역시 축적하여야 소비를 하고, 소비를 하여 자꾸 재 축적을 시키듯이 인간의 마음도 무언가 붙잡고 의지하고 싶고, 무언가에서 탈출하고 벗어나고 싶기도 할 것이다. 고정적이면서도 유동적이고, 유동적이면서도 고정적인게 인간의 마음일 것이다.

이것으로 理氣론은 줄이고 性情론으로 넘어 가겠다. 理와 氣의 관계는 서로 섞여 있으면서도 一物이 아니고 서로 구별되어 있으면서도 二物이 아니다.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