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 우의 말씀을 되풀이 하고 나서 고요는 우러러 모시면서 말하기를 제요께서 희로애락을 항상 절도에 맞게 한 것은 사람을 알기가 어렵기 때문이요 우왕께서 희로애락을 항상 절도에 맞게 한 것은 감히 사람 알기를 쉽게 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세상 사람들이 희로애락을 함부로 나타내고 지나치게 움직이는 것은 모두가 몸가짐을 성실하게 하지 않거나 사람을 밝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람을 안다는 것은 제요도 어렵게 여겼고 우왕도 탄식한 것이니 그 누가 만족히 여겨 스스로 기뻐할 것이랴. 대개 더욱 자기의 정성을 반성해 보면서 반드시 사람을 쓰고 버리는 것을 경솔히 해서는 안될 것이라 했다. 」

- 원 문 -

유교와 옛날의 기독교는 비슷한 점이 많다. 둘다 제천의식을 중요시하고 - 구약에는 여호와에게 제천의식을 행하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유교와 다른 점은 하늘에 있는 신(神)의 개념의 차이이다. - (하늘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를 것을 요구한다. 구약에서는 여호와가 지시하는 길로만 따라올 것을 말하고 유교에서는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 그릇의 위치까지 어떻게 할 것인가 가르쳐 놓았다. 성경이나 유학에서 말하는 성인들의 가르침대로만 하면 에덴동산이나 요순시대가 실현되는데 게으른 인간들은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이다.
(역사편에 신라를 건설한 소호금천씨와 이스라엘민족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재야 사학자 문정창님에 의하면 소호금천씨의 한갈래가 슈메르문명을 이룩했고 이스라엘의 시조인 아브라함은 슈메르 민족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보편적인 문화와 사회구조 속에 강하게 침투되어 있던 시기를 서양사람들은 암흑시대라 부르고 중국이나 한국의 역사 역시 인간의 창조성과 이성, 감성, 등을 빼앗기고 있던 시대라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송나라이후 한국에서는 고려 중기 이후 소위 새로운 정신문명이란 것이 없었다고 본다.

모든 것은 공맹과 몇몇 사람이 지은 책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조선에서는 옳은 것이 누가 더 공맹의 글을 올바로 해석하고 있는가 였다. 이런 습성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위의 글 역시 사람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말하고 있다.

知人正己니 正己知人이니 하는 말이 있다.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180°다른 관점의 말이다. 먼저의 글은 다른 사람을 알게되면 스스로를 바로 세울 수 있다는 말이고 뒤의 글은 스스로를 바로 안 연후에야 다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전자가 외부 현실 속에서의 인간들의 행태를 통한 반성을 통해 스스로를 바로 세우는 것이라면 후자는 자신의 마음의 각종 변화를 주의 깊게 읽어낸 연후에 스스로의 뜻을 정할 수도 있고 행실을 바로 정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마음도 알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둘 다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주관적이고 사람의 마음의 변화는 易과 같기 때문이기도 하다. "홀짝"을 하는 두사람처럼 사람의 마음은 생각하면 할수록 변화가 많을 것이다.

어쩌다 요행히 몇 번 승부에 이겼다고 다른 사람을 알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知人正己 正己知人 어느 것이나 중요할 것이다. 스스로를 바로 세운 연후에야 스스로의 생각에 의거 다른 사람의 마음에 흔들림이 없이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것이고 다른 사람과의 인간관계 속에서 다른 사람의 생각하는 바를 바로 안 연후에야 스스로의 생각도 더욱 좋게 지키거나 혹 잘못된 것은 교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비록 착한 일을 좋아하는 마음이라 해도 몹시 급하게 착한 일을 좋아하고 보면 그것은 반드시 분명하지 못할 것이요, 아무리 악한 일을 미워하는 마음이라 하더라도 몹시 급하게 악한 일을 미워하고 보면 그것은 반드시 두루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세상일은 마땅히 좋은 사람과 함께 해나가는 것이 좋으니 좋은 사람과 일을 해나가지 않으면 기쁜 마음과 즐거운 마음이 반드시 번거로울 것이다. 세상일을 마땅히 좋지 않은 사람과는 해나가지 말아야 할 것이니 좋지 않은 사람과 일을 해나가고 보면 슬픈 마음과 노여운 마음이 더욱 번거로울 것이다. 」

- 원 문 -

쇠뿔도 단김에 빼려는 마음의 사람이 돌다리도 두드려 보려하는 사람을 볼 때는 답답하기가 이를 데 없을 것이다. 반면 이 반대의 경우에는 먼저의 사람은 생각이 짧고 경박하기가 이를 데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매우 서로를 필요로 하기도 한다. 그래서 세상인 것이다. 위의 글은 첫째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시켜주거나 도와주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행위에 있어서는 기술적인 방법론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뜻이 좋으면 결과도 좋다는 중국속담이 있다. 일단 이러한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잘살아 보자며 노동자들이 허리띠를 졸라맬 때 어느 구석에선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회를 정화시키겠다며 삼청교육이니 뭐니 만들고 실행할 때도 그 폐해는 수도 없이 많았다.

스스로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스스로의 생각일 뿐이다. 한 인간은 스스로는 인간들이라는 구조 속의 한 명이지만 나 하나와 인간들은 어떤 한 인간에 대해서는 구조이다. 즉 나의 생각과 행위는 다른 사람에게는 구조로써 작용된다는 것이다. 막말로 자기이외의 타인은 바둑판의 돌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분명 착한 일을 좋아하는 행위라도 악한 일을 미워하는 행위라도 생각이 넓고 깊지 못하면 잘못된 구조를 형성시킬 것이다.

불교에서는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수행방법이 있다. 몇년전 타계한 성철스님은 돈오돈수를 주장하였다. 돈오돈수는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주장된 이래 현재까지 한국불교계의 중심 되는 관념이었던 돈오점수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되었다.

돈오점수설은 대략 이러하다. 깨달음이란 일시에 이루어지지만 닦음은 일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수도자는 먼저 깨치고 그런 다음 오랜 세월을 두고 점차적인 수행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의 깨달음은 불경 읽기를 통해 시작된다. 그러한 불경 읽기를 통해 생기는 내면적 변화를 깨우침이라 한다.

불경을 읽는 도중 어느 순간 오는 깨우침 이것이 돈오(頓悟)이다. 그러나 이것은 궁극적인 깨달음인 증오(證悟)는 아니다. 증오는 이때의 깨우침을 실마리로 수행과 참선 등을 계속해 나갈 때 -점수(漸修)-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돈오돈수는 깨달음을 얻었다면 더 이상 무엇을 닦는다는 말인가 하는 돈오점수에 대한 의문 또는 회의, 비판에서 비롯되었다. 깨달음을 얻었다면 즉각적인 수행만이 있다는 것이다.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기가 어렵지 깨달음을 얻었다면 이제는 실행만이 있다는 것이다. 처음의 깨달음은 아직 궁극적인 깨달음이 아니기에 이후 점차적인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완성한다는 것은 인간의 知 즉 인위의 영역인 것이며 이는 깨달음을 얻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진정한 깨달음의 최대 장애물이라는 것이다.

돈오돈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깨달음이 아닌 것을 깨달음으로 착각하는 일이고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길은 올바른 화두(話頭)를 듣고 참선하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 논쟁으로 보는 한국 철학 中 요약 -

어느 이론이나 다 옳은 말이고 문제점은 있고 비평의 여지가 있다. 이런 것이 오히려 완전함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올바른 화두란 무엇일까? 깨닫기만 하면 더 깨우칠게 없는 것일까? 그러나 이러한 점은 이 책에서 다룰 내용도 아니고 필자도 더 이상은 잘 모른다. 돈오돈수는 그 바탕에 짧은 행동, 급함, 빠름의 마음이 보이고 있다.

반면 돈오점수설은 그 바탕에 긴 시간, 사색, 느림의 마음이 나타나 있다. 돈오점수나 돈오돈수나 다 같이 그 사람과 그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돈오점수는 그 같은 생각이 나와야 하는 개인적 특성과 시대적 상황이 있었고 돈오돈수 역시 그만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독자는 스스로가 어떤 쪽의 이론에 더 마음이 끌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