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양인의 노여움은 한 사람의 노여움을 가지고 천만 사람을 노엽게 할 것이니 그 노여움이 천만사람을 다룰 방법이 없다면 반드시 천만사람을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소음인의 기쁨은 한 사람의 기쁨을 가지고 천만사람을 기쁘게 할 것이니 그 기쁨이 천만사람을 다룰 방법이 없다면 반드시 천만사람을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소양인의 슬픔은 한 사람의 슬픔을 가지고 천만사람을 슬프게 할 것이니 그 슬픔이 천만사람을 다룰 방법이 없다면 반드시 천만사람을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태음인의 즐거움은 한 사람의 즐거움을 가지고 천만사람을 즐겁게 할 것이니 그 즐거움이 천만사람을 다룰 방법이 없다면 반드시 천만사람을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 원 문 -

두사람이 술잔을 대하니 산꽃이 지네

한잔들게 한잔들게 또한잔 들게

나는 취하여 잠을자려하니 그대는 잠시 돌아갔다가

내일아침 생각이 나거든 거문고 안고 오게

- 이태백 山中對酌(산중대작) -

이태백은 한창때는 양귀비에게 벼루를 받쳐들라 하여 놓고 당현종 앞에서 시를 짓기도 하였다 한다. 술에 취해 물 속에 비친 달을 잡으려 물 속에 뛰어들어 죽었다는 이태백. 그가 천만사람을 당할 재주가 없이 어찌 그와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한다. 그의 시는 오늘날에도 천만 사람을 감동시키기도 있지 않는가

月 夜

오늘밤 부주(부州)에 비치는 달빛을 아내는 혼자 방에서 바라보겠지.

더더욱 가엾은 것은 어린 것들이 어려서 저희 어머니가

장안에 갇혀있는 아빠를 생각하는 것을 이해도 못한다는 점

향기로운 밤안개는 아름다운 그대의 머리채를 적시고

맑은 달빛은 그대의 옥같은 팔에 비칠 것

어느때나 우리 두사람이 함께 엷은 빛이 비치는 창가리개에 기대서서

달빛아래 눈물자국 마른채 마주 서 보리

- 두보 김창현역 -

일생을 시와 고생으로 일관한 시성(時聖) 두보(杜甫)의 시이다. 두보 역시 천만사람을 감동시킬 재주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

파랑새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되어

푸른바다 푸르들 날아다니며

푸른노래 푸른울음 울어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되리

나병에 걸려 고난의 인생을 살았던 "가도가도 황톳길"의 한하운의 시이다.

비단 시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행위나 음악, 미술, 소설 등을 통해 인간은 기호를 이용 곧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움직일 수 있다. 특히 매스컴이 발달한 오늘날은 아프리카 오지의 한 개인의 슬픔이 TV를 타고 전세계를 슬프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 태양인 소양인은 다만 항상 지나치게 슬퍼하고 노여워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또 억지로 기쁨과 즐거움을 꾸며서 헛되게 움직여 따르지 못하게 되어도 못쓴다. 만일 억지로 기쁨과 즐거움을 꾸며서 번거롭게 자주 나타내고 보면 기쁨과 즐거움이 진정에서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슬픔과 노여움도 더욱 치우치게 된다. 태음인 소음인은 다만 항상 지나치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또 억지로 슬픔과 노여움을 꾸며서 헛되게 움직여 따르지 못하게 되어도 못쓴다. 만일 억지로 꾸며서 슬픔과 노여움을 번거롭게 자주 나타내고 보면 슬픔과 노여움이 진정에서 나오지 않을 뿐이니라 기쁨과 즐거움도 더욱 치우치게 된다. 」

- 원 문 -

어쨌건 자기 감정에 솔직한 것이 정신적인 건강에도 좋을 것이다. 태소음양인은 항상 지나친 슬픔과 노여움을 경계하고 억지로의 기쁨과 즐김을 꾸며내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고 태소음인은 항상 지나친 기쁨과 즐김(즐거움)을 경계하며 억지로의 노여움이나 슬픔도 경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낙정은 항상 여유로운 마음과 넉넉한 마음을 만들지만 이와 함께 놀고먹고 사치하기에만 몰두하게도 만들 것이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이냐에 따라 낙정의 변화 여하에 따라 그는 혼란 속에서도 결코 동요치 않기도 하고 두려움에 발이 얼어붙어 꼼짝 못할 수도 있고 남이야 세상이야 어떻게 자기자신의 안위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My Way( 나의 길을 가련다 )가 뜻하는 개념과는 완전히 다르다. 태음인은 교심 즉 오만하게 남들에게 군림하는 마음이 좀 많다. 이러한 교심이 낙정과 어우러지며 그 정도가 심해지면 그야말로 안하무인이 될 것이다.

노정은 결코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게도 한다. 상대가 아무리 크고 강하건 노정이 강하게 되면 달겨들 것이다. 그것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 되어도 노정이 강하게 되면 돌진할 것이다. 그러나 "노정" 역시 여러 가지 천의 얼굴을 하고 현상을 일으킨다.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인정치 않고 남을 헐뜯고 공격하기만 일삼는 것도 "노정"의 탓이다.

슬픔의 감정 역시 다른 모든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 사실 다른 모든 감정도 하나의 마음에서 나오지만 그중 회의적이고 체념적인 감정을 잘 느끼는 마음의 상태가 다른 모든 감정 상태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애정은 노정과 어우러져 강한 원통함이나 원한, 복수심을 일으킬 수도 있고 도박 등과 연결돼 통렬한 기쁨을 맛보고 싶어하기도 할 것이다. 그는 또 세상만사 다 잊고 떠돌아 다니거나 바람들린 차돌처럼 자존심을 던져버리고 인생을 즐기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애정은 현실에 대한 저항이나 비판, 인내의 수단으로 될 수도 있고 강한 불만족 부정의 심리와도 연계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소양인은 과시의 심리가 강한데 애정과 어우러지면 그는 자기 자신의 과시를 짜증이나 슬픔의 감정 극복의 수단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는 또 무엇이든지 비판적이며 무엇이든지 냉소적이거나 공격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희정은 남들이 무시하는 아주 사소한 일에서조차 기쁨을 찾아내는 좋은 특징도 있고 무조건 기쁨을 구하기만 하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원칙은 없고 원리만 있을 것이다. 부정은 없고 긍정만 있을 것이다. 마치 강아지처럼 무조건 주인의 비위만 맞추다보니 이래도 꼬리를 흔들고 때려도 꼬리를 흔들고 맞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는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일에도 신념을 가지고 끈기있게 모든 성의를 다 할 수도 있다.

희정이 강하여 질수록 매사에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면이 많아 질 수도 있고 낙정과 어우러지며 극히 처세적이고 실용적이거나 무조건 좋게 좋게 생각하려는 면도 나타날 수 있다. 희정이 강하여 질수록 공격적인 성품이나 노여움, 슬픔의 감정과 그러한 감정이 일으키는 행위들도 적게 나타나겠지만 한편 무조건 회피하고 원만함을 추구하거나 남의 비위 맞추기에만 급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희정 또한 희정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냐에따라 조금 혹 많이 극복되어질 것이다. 희정이 애정이나 노정과 안 좋은 방향으로 이루어지면 그는 희정을 이루지못해 방황할수도 우울증에 걸릴수도 강한 노여움이 나타날수도 세가지가 모두 어우러지며 나타날수도 있다.

노정과 애정, 희정과 낙정은 서로 이루어지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희, 노, 애, 락의 성정은 함께 어우러져 이루어진다. 때문에 소음인도 화가 나면 슬픈 감정이 행위로 나타날 수 있고 태음인도 그러하다. 어떤 사람이든 특징적인 성정에 의한 행동이 극단적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다.

태, 소양인도 희정이나 낙정에 이끌려 행위할 수 있다. 희, 노, 애, 락의 성정은 인간이 정한 기호이자 본질을 알아내고자 하는 형식일 뿐이다. 그러나 다만 형식적이지만 하여간 이러한 형식을 통해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다.

「 희로애락이 아직 나타나지 않는 것을 中이라 말하고 나타나기는 해도 모두가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희로애락이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이를 항상 경계하는 자야말로 점점 중(中)에 가까워지는 자가 아니겠는가. 희로애락이 이미 나타난 뒤에 스스로 반성하는 자야말로 점점 절도에 가까워지는 자가 아니겠는가. 」

- 원 문 -

중용에 나오는 글이다. 이런 사람을 소위 군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라나며 서로 접하고 생활을 겪으며 아마 저절로 어느 정도나마 스스로 자신을 절제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행동에 절도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 이것은 개인적인 수양이나 처세와는 관계가 많지 않다. 和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확충론에 들어가기 전 하나 생각해보자. 확률과 통계이다. 이 책에 쓰인 대체라는 말은 통계이다. 그러면서 확률이다. 대체로∼ ∼하다는 말은 그런 경우가 많은 것이고 그러할 확률이 많다는 말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대체로 그러할지 필자는 모른다. 이후로도 "대체"라는 말은 참고사항 정도로 알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체는 일단 윤곽을 만들어 보는 것일 뿐이다.

동전을 던져 앞면 혹은 뒷면이 나오는 확률을 생각해보자. 한 번 던졌을 때 앞면 혹은 뒷면이 나올 확률은 이분의 일이다. 두 번 던졌을 때 연속으로 앞면 혹 뒷면이 나올 확률은 앞앞, 앞뒤, 뒤앞, 뒤뒤 중에 하나이다. 1/4(4분지1)이다.
세 번 던져 연속으로 앞이 세 번나올 확률은 앞앞앞, 뒤앞앞, 앞뒤뒤, 앞앞뒤, 뒤뒤앞, 뒤뒤뒤, 앞뒤앞, 뒤앞뒤 하여 1/8 (8분지1)이다. 이와 같이하여 동전을 n번 던져 모두 앞면만 나올 확률은 대략 2n분의 일임을 알 수 있다.

이번엔 점적으로 생각해보자.
동전을 두 번 던졌는데 모두 앞이 나왔다고 하자. 확률적으로 세 번째 던지는 경우에 앞이 나올 확률은 8분지1(1/8)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세 번째 던질 때 그 확률이 과연 8분의1일까?

 아니다 . 이분의 일이다. 백번을 던져 앞면이 연속 나와도 천번을 던져 앞면이 연속 나와도 백한번째 천한 번째 동전이 앞면이 나올 확률은 이분의일 이다.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만 번을 던졌을 때 그것이 모두 앞면일 수도 있다.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확률적으로는 가능하다. 단 그 확률은 210000분의 1이다. 확률적으로는 십만 번이든 백만 번이든 모두 앞면이 나올 수가 있다. 단 단지 한 번일 뿐이지만 그러나 구천구백번이나 또는 구만구천구백구십구번이 모두 앞면이
나왔어도 만 번째 십만 번째 동전을 던질 경우 그 다음에 앞면이 나올 확률은
이분의일(1/2) 이다.

"게다"와 "니다"는 바로 이 경우와 같다. 1억번을 던졌을 때 그것이 모두 앞면이 나올 확률은 수학적으로는 분명 있다. 이것이 "니다"이다.

1억번을 던져 모두 앞면이 나올 경우를 생각할 때 구천구백구십구만구천구백구십구번이 모두 앞이 나왔더라도 1억번째 하늘위로 올라가는 동전이 1 / 2중 어떤 것이 될지 알 수 없는 것 이것이" 게다"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