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의 장부도 사단(四端)이요 보통사람의 장부도 역시 사단이니 성인의 한 개 사단의 장부를 가지고 모든 보통 사람의 만개의 사단속에 처하게 된다. 때문에 성인은 보통 사람들이 즐겨하는 바가 된다. 성인의 마음은 욕심이 없고 모든 보통 사람의 마음은 욕심이 있으니 성인의 한 개 욕심없는 마음을 가지고 모든 보통 사람의 만개 욕심있는 속에 처하게 된다. 때문에 모든 보통 사람들은 성인의 걱정거리가 된다. 」

- 원 문 -

공자는 성인이라고 유가에서는 말한다. 공자는 정갈하지 못하거나 색깔, 냄새가 나쁜 음식은 먹지 않았고 때가 아니거나 음식을 썬 것이 반듯하지 않아도 먹지 않았고 간이 맞지 않는 음식도 먹지 않았다 한다. " 동의보감 " 이라는 소설에 보면 허준이 처음 약초를 캐러 갔을때의 이야기가 나온다. 허준의 스승은 다른 제자들이 허준보다 약초를 더욱 많이 캐어왔는데도 그들을 나무라고 허준을 칭찬한다. 그 이유는 다른 제자들은 많이 캐오는데만 정신이 팔렸지만 허준은 양은 적지만 잔뿌리 하나까지도 정성을 다해 조심스레 캐내었기 때문이었다. 스승은 양적인 결과 보다는 질적인 결과와 그 행위를 나오게 한 정성되고 진실된 마음을 본 것이다.

공자는 부인이 좀 상한 음식으로도 요리를 하고도 그것을 나무라는 공자에게 불평을 하자 그길로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한다. 아마 평소에도 좀 정성된 마음이 없어서 였을까? 공자의 뜻이야 둘째치고 공자의 부인은 매우 힘든 시집생활을 하였을 것 같다. 그러나 공자의 사상은 중국, 일본뿐아니라 고려, 조선을 이러내려오며 아직까지도 이나라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고 이제는 세계적으로도 크게 조명받고 있다.

그러니 천하의 모든 보통사람들의 장부도 역시 모두 성인의 장부와 같다. 그 재능은 또한 성인의 재능이다. 같은 폐, 지라, 간, 콩팥에 성인의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아무런 재능도 없다」고 한다. 이것이 어찌 재능의 죄이겠는냐? 그것은 사실은 마음의 죄인 것이다. 」

- 원 문 -

책심과 관련된 글이라 하겠다. 우리가 휼륭하다고 하는 사람도 못났다고 하는 사람도 선천적으로는 똑같은 자질과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후천적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성인도 되고 못난 사람도 될 수 있다는 뜻이리라. 이번엔 역으로 생각해 보자. 동전에는 앞면과 뒷면이 있고 선과 악은 항상 공존한다. 태극에는 음과 양이 있고 세상에는 부자와 가난한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똑똑한 사람과 둔한 사람이 항상 있다.

공자는 나온것과 못한 것을 구분짓거나 분명히 획을 그어 말한다. 군자와 소인, 하늘과 땅, 선과 악, 훌륭한 것과 못난 것 등을 함께 말하며 판단의 기준을 세워준다.

易의 괘 풀이에서 ㅡ 는 움직임을 -- 는 고요함을 뜻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不易이나 易簡을 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變易을 하지 않는 것이 된다. 형식을 본질로 깨닫는 것이 된다. ㅡ 는 ㅡ 이전에는 -- 였고,ㅡ 이후에는 -- 가 된다. --는  -- 이전에는 ㅡ였고,  -- 이후에는 ㅡ 가 되는 것까지 생각해야 번역, 불역, 이간의 삼박자를 갖추게 된다.

이 말은 ㅡ 는 움직임으로, -- 는 고요함으로만 고정시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현재는 고정시켜 보아야 한다.ㅡ 괘는 고요함에서 나와 움직임을 거쳐 고요함으로 가는 것이고, --괘는 움직임에서 나와 고요함을 거쳐 움직임으로 가는 것이 된다.

 ㅡ → -- → ㅡ

-- → ㅡ  → --

위의 그림이 그것이다. 곧 움직임속에 고요함이 있고 고요함속에 움직임의 뿌리가 있다는 말이 된다. 연역되는 이론은 귀납에서 나온것이고 귀납되는 이론을 반드시 무언가를 연역한 것이다. 그리고 이 생각을 고정시키면 다시 당신은 형식을 본질로써 착각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항상 유동적으로 두려면 천상 남의 말을 잘 이해하려는 자세가져야되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주체를 잃지않는 고정관념을 가지려면 많이 아는 것이 최우선일 것이다.


위의 그림은 이러하다. 먼저 관념론의 입장에서 보자 관념론은 유물론과는 상대적이라 관념론적인 것을 유물론과 절충하거나 혼동하게 되면 반드시 모순에 빠진다. 그러나 합리론이나 경험론을 가져다가 스스로의 생각을 나타낼 수는 있다. 이점은 경험이나 합리론은 관념론과 유물론을 자의적으로 가져다 스스로를 나타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스스로 본질이 아닌 기호의 특성상 이러한 특징은 필수 불가결하다. 관념론이나 유물론의 입장에서 또한 합리와 경험은 서로간에만 상대적일 뿐 別되어 있는 기호일 뿐이다.

「 호연의 기운은 폐, 지라, 간, 콩팥에서 나오고 호연의 이치는 심장(혹 마음)에서 나온다. 인, 의, 예, 지 같은 네장부의 기운을 넓혀서 채운다면 호연의 기운은 여기에서 나올 것이요, 비박하고 탐나한 마음의 욕심을 분명하게 가려낸다면 호연의 이치는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 - 원 문 -

「감히 여쭈어 보겠습니다. 무엇을 호연지기라 합니까?

말하기 어렵다. 그 氣란 지극히 크고 강하여서 바르게 길러 해치지 않는다면 하늘과 땅사이에 가득차게 될 것이다. 그 氣란 정의와 정도에 부합되는 것으로써 그것이 없으면 시들어 버린다. 」

- 맹 자 -

이제마는 맹자가 말한 이러한 호연지기가 폐, 비, 간, 신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이것이 유물론적인 말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유물론 유심론은 할까말까, 살까말까, 이것일까, 저것일까의 판단하는 버릇속에서 생긴 이분법적인 구분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 문 " 으로 하여 사상의학을 해부하여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폐, 비, 간, 신 의 기능상 좋고, 나쁨이 신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필자는 모른다. 호연의 이치라는 말은 맹자에는 없다. 사단칠정론에서도 본연의 성은 말하지만 호연지리라는 말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호연지리라는 말은 이제마가 만들어낸 말 같다. 호연의 기운은 인의예지 性을 가득 채울 때 나오고 호연의 이치는 마음의 욕심을 철저히 가려낼 때 나온다는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는 마음은 인의예지의 마음을 가득채울 때 뿐만 아니라 사심과 욕심 등을 철저히 가려낼 때 나온다는 말일것이다.

「 성인의 마음에 욕심이 없다고 한 것은 청정하고 적멸해서 노자나 부처님처럼 욕심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성인의 마음은 천하가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을 깊이 걱정하는 것이다. 때문에 비단 욕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 한 몸의 욕심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천하가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을 깊이 걱정하여 자기 한몸의 욕심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이는 반드시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고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고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성인은 욕심이 없다는 것이다. 털끝만큼이라도 자기 한 몸을 위한 욕심이 있다면 이것은 요순의 마음이 아니요 잠깐 동안이라도 천하를 걱정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는 공자와 맹자의 마음이 아닌 것이다. 」

- 원 문 -

이러한 공맹의 도로써 조선 500년이 지나갔다. 조선시대는 이러한 공맹의 학문을 두루 통달한 사람을 시험을 보고 뽑아 관리로 등용하던 시대였다. 과거제도 자체는 지금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할 만한 제도였다. 문제는 그토록 좋은 말과 사상이 들어있는 유교 경전을 통달한 사람들이 조선을 다스렸는데도 공, 맹이 바라던 유학적인 이상국가는 건설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상국가는 단지 이론일 뿐이라 하더라도 조선시대의 관료들이 공, 맹의 가르침을 실천했냐 하며는 그렇치도 않다. 이점은 같은 제도를 실시했던 중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 중국은 조선과는 달리 외래문물과도 접촉이 잦았고 보다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섞여있어 조선처럼 외곬으로 빠지지 않았다는 점이 다를 것이다. 왜 그럴까?

플라톤의 철인국가가 이론뿐아니라 현실로써 실행되었는데도 이상국가는 커녕 조선말기로 흐를수록 부패와 수탈만 더 하였었다. 분명 유학에도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학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 문제점을 인정치 않는데 있을 것이다. 독재자는 반대하는 사람이 없으면 독재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기호는 상대적인 것이 없으면 절대독재를 이끌어낼 것이다. 유학은 전인적인 인간성을 교육하고는 있지만 타자와의 관계에 대해선 별로 언급이 없다. 유학을 제대로 통달하면 그 모든 행동이 선하고 합리적이기 때문에 타자와의 관계가 필요없다고 생각하여서 일까?

인간역시 기호처럼 단지 수많은 사람중의 하나 일뿐이다. 세계는 그러한 수많은 사람들로 구성되어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공, 맹의 도 뿐만아니라 온세상의 모든 좋은 말들을 모두 외우고 있다해도 단지 독재자 일 뿐이다. 대화와 토론의 기술, 항상 새로운 현상에의 대비, 분석의 방법론 이러한 것들이 인간들 속에선 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

나라이름을 조선으로 할 정도면 단군조선의 사상적 전통까지 잇는게 낫지 않았을까 한다. 어쩌면 1392년경의 학자들은 이 나라가 뿌리까지 진짜 소중화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 당시는 아직 황하나 만주지역이 단군조선의 영토임이 쓰여있는 옛 서적들이 많이 있었고 요순시대의 순임금이 단군조선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은 스스로도 이(夷)족이라는 것을 오늘날보다 더 잘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 대해서는 허리를 굽신거리며 소중화를 자처하고 여진 등에 대해서는 소중화를 외쳤을 수도 있다. 그럼 무엇이 조선시대를 출범시킨 사람들에게 표면상으로는 이(夷)임을 곧 한(桓)족임을 숨기게 하였을까? 여진, 몽골, 그밖의 북방의 여러 한(桓)족계열의 부족들이 문화적으로 낙후되어 서였을까? 아니면 그들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서로 떨어져 오랜 세월이 흐르다 보니 말도 관습도 문화도 달라져서 일까? 아니면 신라이후 본격적으로 받아들인 중국문물로 인해 중국과의 동질성이 더 깊어서 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