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따로따로 意(의), 慮(려), 操(조), 志(지)에 대해 변별해 놓고 극단적인 경우에 대해서 써보았지만 인간의 마음속에서 이 네가지 움직임이 따로따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이기 때문이고, 마음은 메카니즘을 갖고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분지음은 단지 설명하기 위함일 뿐이었다.

극단적으로 慮와 意가 강하다면 그는 축이라 할 수 있는 생각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관심이 밖으로만 향해있는 또는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른채 현상만을 좇아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는 현상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답안에만 몰두한 나머지 스스로도, 가족도, 친구도, 사회도, 국가도 없을 것이다. 시내도로에서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다 하자. 웬만한 정체가 아닐때는 자동차는 기차가 아니기 때문에 도로에서는 차와 차의 사이에는 항상 차 두세대의 거리가 있다. ( 시내의 경우 )

그런데 이 틈새를 비집고 요리조리 미꾸라지 운전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慮와 意의심리적 움직임이 강한경우라 할 수 있다. 또 들어보겠다. 시험을 보고 있다 하자 철두철미한 감독이 아닌한 요령껏 머리만 쓰면 컨닝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이 때 컨닝하기위해 온갖 지혜를 짜내는 마음의 움직임과 사고행위 慮와 意의 심리적 움직임이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다 할 수 있다. ( 미리 준비하는 마음은 제외이다. 상황에 부닥쳐서이다. )

" 이렇게 하면 되겠다. ", " 요렇게 하면 될 것 같다. " 하는 등등의 사태, 상황, 현상 등에 맞닥뜨려서의 효율적인 방법론을 생각하는 마음의 상태가 강하고 그에 따라 뜻을 맞추고 행동하는 것도 慮와 意가 강한 경우라 할 것이다.

이럴수도 있다. 자기도 별로 돈이 없으면서 불쌍한 사람을 보고 주머니 가진 것은 다 주어버리는 행위, 스스로는 별 볼일없는 입장이면서도 남의 일에만 동정하거나, 관심이 쏠려있을 수도 있다. 또한 민족이나 국가는 어떻건 순간의 감정만으로도 행동이 변할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도 慮와 意가 강한 경우라 할 수 있다.

操와 志가 너무 강하다면 자신의 틀내에서 갇혀 자기 생각대로만 움직이기 쉽다. 극단적으로 操와 志가 강해지면 그는 자기 생각을 절대로 바꾸지 않는다. 일편단심 하나는 똑소리 나게 할 수도 있다. 意가 겉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이라면 [〓], 慮는 계속 안에서 밖으로 튀어나가려 운동하는 [] 것이다. 操가 꽉잡고 있거나 꾹꾹 뭉치고 있고 누르고 있는 모습이라면 [==], 志는 안으로 모여들고 핵을 형성하고 그 주위로 몰려 들어오는 모습을 연상하라. [].

操(조)와 志(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는 자신의 신념과 생각에만 몰두한 나머지 스스로도 가족도, 친구도, 사회도, 국가도 없을 것이다. 시내도로를 주행하고 있다 하자. 법규를 조금 어기거나 조금씩 양보하면 막혔던 길도 쉽게 뚫린텐데 그는 죽자하고 교통법칙과 자신의 핸들만 고집하고 있을 것이다. 때로는 그는 오히려 慮와 意가 강한 사람보다 더 교묘하게 법규를 어기고 날렵하게 법 교통의 흐름을 무시할 수도 있다. 그것은 그의 操(조)와 志(지)가 그렇게 명령할 때이다.

그러나 그는 법을 준수하려는 사람이라 생각하자. 그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가기 위해 차선을 위반하여야 할 경우가 생기더라도 무슨일이 있어도 차선을 위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먼길을 돌아가는 방법을 택할 것이다. 그는 백지를 내는 한이 있어도 컨닝은 하지 않거나 완벽한 계획하에 컨닝을 할 것이다. 무조건 意慮와 操志를 양극적으로 보지 않아야 할 점이 여기에 있다. 操와 志의 심리는 그의 생각이 컨닝을 하는 것으로 결정되면 완벽한 계획하에 움직인다는 것이다. 즉 무슨생각을 하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 이렇게 할 것이다. ", " 저렇게 할 것이다. " 하고 마음이 정해지면 操와 志의 마음은 잘 움직이지 않는다. 원칙에 지나치게 얽매이고, 고루하고, 비타협적이고 하나에만 매달려 있기도 하게된다. 모든 것은 현상속에서 평가될 것이다. 극단적으로 또는 순간적으로 意와 慮가 강해질 수도 있다. 가령 " ○○ " 라는 제목을 놓고 무슨 글을 짓는다 하자.

이때 자신의 생각이야 어떻건 " ○○ "라는 제목에 맞춰 자신의 생각이 집중되어야 할 것이다. 이때 操와 志가 약해지고 意와 慮가 커지게되면 자신의 처지나 생각하는 바야 어떻건 그 ○○이라는 제목에 맞춰 멋들어지게 시나 수필을 하나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일제시대 어느 작가들은 태평양 전쟁으로 나갈 것을 독려하는 가슴이 뭉클하는 글들을 발표하였었다. 해방후 이때 글을 발표했건 한 작가는 일본이 그리 빨리 망할 줄 몰랐다나. 이런 경우는 조선시대의 거의 모든 유학자 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유학의 학문이야 어디 나쁘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스스로 소중화라 자처하여 중국의 역사적인 인물들을 말하고, 중국이 역사를 말하고, 중국의 고정을 탐독하는 것을 넘어 지명까지 한양이니 한강이니 하였다. 意와 慮가 강하고 操와 志가 약했다가 종국에는 중국의 역사가 한국의 操와 志가 되버린 경우라 할 것이다. 반면 操와 志가 강하면 그리고 그의 操와 志가 ○○라는 제목에 별관심이 없다면 그는 한줄도 쓰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다 쓰자면 얼마를 더 써야 할 지를 모르겠다. 단 하나 환경, 성장환경, 문화, 교육 등에 따라 사람마다의 의려조지는 사상인의 특징과 일대일 식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교(驕), 긍(矜), 벌(伐), 과(  )는 고립되어 있고 하여간 누구에겐가 부양을 받으며 아기시절과 어린아이 시기를 보내야 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사회, 구조, 구조 속의 타인들과 관계하며 자연적으로 생겨나 가지고 있게되는 마음이라 하였었다. 어떤 경우엔 驕라 하고 어떤 경우엔 伐이라 한다고 글자로써 지정하여 놓기는 하였으나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정확히 갈라놓을 수 있는 장소나 메카니즘적 요소가 있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