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와 심리

기호를 사용하는 이상 기호로써 어떤 관념을하나 혹은 최소의 단어를 조합하여 축약시켜 놓지 않고는 인간의 사고행위는 개념을 잡을 수가 없을 것이다. 끝없는 시간의 흐름에서 문제점이라 할 수 있는 사건들은 항상 터져 나오게 마련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A는 B다 식의 기호로써 정리되고 정의 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할때는 문제는 계속 문제를 낳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번엔 기호로써 정리, 정의되면 또 그 기호에서 새로운 문제점들이 생겨날 것이다. 결코 기호 A는 기호 B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의 정의는 기호를 사용하는 이상 넓은 땅덩어리중 자신이 밟고 있는 발바닥만큼의 땅인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받쳐주고 있지만 거기에는 자신이 밟지 않고 있는 무한대라 할 수 있는 땅이있다.

첫 문장의 문제는 혼란의 연속이고 두 번째 문장에서 말하는 문제는 시행과 착오 이기도하다. 해결책에 이은 새로운 또는 색다른 문제점의 발생이다. " ∼은∼이다. " 로써 정의된 기호는 그에 따른 개념과 방법론이 있을 것이고 현대같은 대중전달체가 발달한 시기에는 급속하게 여러나라의 갖가지 기호들이 서로 영향을 끼치며 새로운 관념을 불러일으키기도 할 것이다. 21세기를 문화의 대결로 보는 까닭도 이 때문일 것이다. " 빠름 " 이 언제부터 지금처럼 부각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간 과거에도 한국인들의 습성중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고 말한바 있다.

사극 등을 보다보면 자주나오는 말 가운데 " 빨리 ", " 속히 ", " 어서 " 등의 부사형 말들이 있다. 물론 이것은 현대의 시나리오 작가들이 사용한 경우라 말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계축일기나 인현왕후전 등을 보더라도 " 빨리 ", " 속히 ", " 어서 " 등의 단어들이 자주 쓰여 있다. 오죽하면 인사말이 " 어서 오십시오 " 이겠는가? 우리의 머리속에 " ○○은 빠른것이어야 한다 " 가 있어서일까?

아마 70년대 이후 선진국 따라잡기 식의 고도성장정책을 구사하며 " 빨리빨리 " 하는 것이 더더욱 부채질 되었을 것 같다. " 하면된다 " 와 어우러지며 " 빨리빨리 " 는 불과 십수년사이에 한국인 거의 전체의 머리속에 뿌리깊이 박혀있어 그에따른 심각한 문제점들을 노출시키고 있다. 물론 " 빠름 " 의 심리에 의해 남들이 놀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해온 것은 분명하다.

당초 " 경제성장 " 에서 파생되었을 " 빨리빨리 " 가 일으키는 갖가지 관념들은 가뜩이나 " 빠름 " 에 민감한 국민성을 자극했을 것 같다. ' 빠름 ' 의 심리는 " 과시 ", " 과장 ", " 자랑 " 등과 어우러지며 교차로에서 옆에서 옆으로 앞으로 뒤로 전염되는 운전자들의 심리처럼 서로간에 영향을 끼치며 정치, 사회, 건설, 경제, 밥먹기, 걷기, 말하기, 운전하기, 학업, 운동,과외열풍 등등 모든 분야에 걸쳐 나타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 빨리빨리 " 라는 기호가 많은 인간을 구속시키게 되었다. " 빨리빨리 " 를 통하여 우리의 관념이 모아질때 술이 사람을 먹는 격이 될 것이다. 졸속행정, 날림공사도 이러한 과정속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 머리에는 마음대로 하는 마음이 있고, 어깨에는 사치스런 마음이 있고

허리에는 게으른 마음이 있고 볼기에는 욕심스런 마음이 있다. 」

- 원 문 -

다른나라는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신체의 부위와의 특성과 어떻게 관계시키는지 몰라도 이제마는 우리말의 특성을 특히 시각적인 표현을 잘 이용하고 있다. 어깨(를)가 으쓱거리다. 어깨가 처지다. 어깨가 무거워지다. 가볍다. 어깨를 겨루다. 이러한 어깨가 주는 시각적인 느낌에서 어깨에는 사치스럼 마음이 있다 했을 것 같다. 허리가 구부러지다. 허리가 꽂꽂하다. 허리를 굽히다. 허리를 못펴다. 허리를 펴다. 등 허리와 관련된 속담이 주는 의미와 시각적인 인상에서 허리에 게으른 마음이 있다는 직관언어를 구사한 것 같다.

엉덩이에 뿔이 났다. 엉덩이가 근질근질하다 . 엉덩이를 붙이다. 궁둥이가 무겁다. (가볍다). 궁둥이가 질기다. 엉뎅이로 호박씨깐다. 꿍꿍이 속이 있다. 할 때의 꿍꿍이 에서도 어딘가 응큼하고 의뭉스럽고 흉물스런 구석이 엉덩이에 있다는 느낌이 들게 만든다. 이외에도 장부와 연결시켜서도 참으로 기가 막히게 설명하고 있다, 쓸개 빠진놈이니 부아가 치민다느니 밸이 고인다느니 하는 말들은 서양의학적으도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고 한다. 이제 다시 본문을 보자.

천(擅),치(侈),라(懶),욕(欲)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씌어졌다. 마음대로 하고싶고, 사치하고 싶고, 편안하고 싶고, 원하는 것을 가지고 싶은 것 역시 인간의 마음이라 할 것이다. 교, 긍, 벌, 과와 굳이 구별을하여 볼 수도 있겠다. 교, 긍, 벌, 과는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지키거나, 유지하거나 알리고자 하는 것이라 하였었다.

擅 : 천단할 천, 마음대로할 천

侈 : 사치할 치

懶 : 게으를 나, 누울 나

欲 : 하고자할 욕, 탐낼 욕, 여기서는 탐낼 욕으로 풀이 했다.

천, 치, 나, 욕은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스스로의 원하는 바를 얻고, 하고 싶은대로 하고,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든 " 만족 " 이라는 상태를 가지려 하는 마음의 상태일 것이다. 화가 났을 때는 벌컥 화를 내거나 때론 때려주고 싶기도 하고 마음대로 일이 되지 않을 때는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도 들 것이며 가진 것이 있으면 멋지게 쓰고 꾸며보고 싶기도 하고, 교통신호를 위반하면 도망쳐버리고 싶기도 하고 일이 저절로 잘 풀려 갔으면 좋겠기도 하고 탐나는 것이 있으면 빼앗거나 훔쳐서라도 갖고 싶기도 할 것이다. 편안하고 싶고, 골치 썩이지 않고 싶고, 마음대로 하고싶고, 한껏 많이 벌어 멋지게 잘 살아 보고 싶고 탐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가져 보고 싶은 것이거의 모든 인간의 마음일 것이다.

이제마는 턱, 가슴, 배꼽, 배를 두고 知를 行한다 하였고 머리, 어깨, 허리, 볼기를 두고 行을 行한다 하였다. (행위를 한다는 뜻)

교, 긍, 벌, 과는 知를 行하는 중에 나타나는 모습이고 천, 치, 나, 욕은 행적이나 형태, 태도 등에 나타나는 모습을 지칭하는 말 일 것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 기호로써 개념을 잡아 혼란을 정리하여야 하는 것이구나 " 하고 생각이 들 정도로 知行과 行行을 엄격한 구분을 짓기가 힘들다.

천, 치, 나, 욕의 마음은 그 동기가 知를 행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하고자 하는 것을 이루거나 마음대로 하고픈 심리상태라 하겠다. 천, 치, 나, 욕은 知와는 관계가 적고, 행동중에 나타나며 욕망, 희망사항, 바램, 소망 등의 마음상태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표면적으로는 주변을 의식하여 격식을 차려야 하겠지만 사실 그 행위중에 마음대로 하고싶고, 사치도 하고싶고, 편안하고 싶고, 그러면서도 무언가를 계속 꿈꾸고 있고 탐나는 것이 있으면 모두 다 가지고도 모자라는 것이 인간의 마음일 것이다. 부처는 욕망을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이라 했다. 누구든 이러한 부처의 말을 말로써 생각으로써 표현으로써 연역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행위로써는 잘 안 될 것이다. 그것이 行行의 어려움일 것이다.

「 마음대로 하는 마음이란 남의 이익을 빼앗는 것이요 - 奪利(탈리)

사치스러운 마음이란 자기를 치켜 세우는 것이요 - 自尊(자존)

게으른 마음이란 못난체 하는 것이요 - 自卑(자비)

욕심스런 마음이란 물건을 훔치는 것이다. -竊物(절물) 」

- 원 문 -

천, 치, 나, 욕의 풀이이다. 스스로 그리고 주변에 의해 인간은 이러한 심리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자제하고 절제하고 있다. 그러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도 불합리하고 감정적인 행동을 하고 싶을 때가 있고 감정적인 사람에게도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려는 면은 있다. 생명의 위협 앞에서는 의리고, 절의고 뭐고 다버리고 살고 싶기도 하고, 불의 앞에서 때론 갑자기 모든 것 다버리고 불끈하는 용기도 생길 수 있다.

좀스럽고 자잘하게 살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이해관계에 빠지면 온 신경이 집중되기가 쉽고, 하던일이 앞에서 잘 안되면 뒤에서 어떤 계략을 꾸며보고 싶은것이 모르긴 몰라도 거의 모든 인간의 마음일 것이다. 인간의 법칙이 정글의 법칙과 다른점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해 퍼져나간 심리학이론들이 퍼뜨려놓은 기호들은 이러한 인간의 욕망을 분석만 하고, 치료만 하고, 긍정만 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철학이 없다는 것이다.

존 레논의 노래중에 imagine 이 있다. You may say , I'm a dreamer해도 좋다. 지금의 심리학은 분석과 평가와 치료만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런 방법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심리라는 거대한 원을 무한대로 미분해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 같다. 천, 치, 나, 욕은 남의 이익을 빼앗고 싶거나 재물을 크게벌어 마음껏 써보고 싶은 것, 스스로 못난체하여 힘든 일이나 어려움 등에서 회피하거나 도망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힘으로 뺏거나 몰래 훔치고 싶기도 한 인간의 마음을 요약한 글이다.

「 사람의 귀와 눈, 코와 입은 더할 나위없이 착한 것을 좋아하 고 사람의 폐와 지라, 간과 콩팥은 더할 나위없이 악한 것 을 미워한다. 사람의 턱과 가슴과 배꼽과 배는 더할 나위없 이 간사하고 - 邪 . 사람의 머리와 어깨 허리와 볼기는 더 할 나위없이 게으르고 오만하다. - 怠 」

- 원 문 -

사람은 "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한다. " 는 주자의 말을 이용하였다.

理性(reason)이 푸코가 말하는 지식과 권력의 근원으로써 자리잡고 서구의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힘이 커짐에 따라 " 이성 " 이라는 기호에서 연역된 갖가지 기호들과 개념들은 곧 전세계의 인간의 사고와 행위에 영향을 끼쳤다. 기호의 확산이다. 이때의 이성은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객관적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행위이다. Logos 가 뜻하는 바와는 다르다.

기호 자체로 보아 서구 철학이 말하는 " 이성 " 은 하나도 나쁜 것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 이성 " 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동물이지 " 이성 " 으로 만들어진 제품은 아니다. 인간은 분명 " 감정 " 의 동물이며 " 이성적인 행위 " 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인간은 각종 기호를 사용하여 생각하고 그 기호들을 조합하고 늘어놓아 논리, 표현 등 즉 가이와 은는을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은 " 이성 " 적인 행위를 하여야 하지만 " 이성 " 이 감정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다. 수많은 책을 읽고 이성적인 행동을 하겠다고 마음먹어도 어느 순간의 ' 감정 ' 앞에서 이성은 한조각 휴지만도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아니 아마 모든 사람들은 입으로는 생각으로는 " 이성 " 이니 어쩌니 하지만 그 이면의 흐름은 " 감정 " 이 지배하고 있을 것이다. 항상 하는 얘기지만 정도의 차이가 문제일 것이다. " 감정 " , " 감성 " 이라 해도 좋고 " 본능 " 도 포함시켜도 된다.

여기서는 이성(理性)과 상대되는 모든 것을 포함한 것에 대해 말하려 할 뿐이다. 그러한 것을 " 칠정 "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 칠정 " 을 희, 노, 애, 락, 애오욕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희, 노, 애, 락, 애, 오, 욕은 선하건 악하건 간에 인간의 모든 감정과 본능의 행위를 단지 7가지로 나타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칠정이라 할 때는 인간의 모든 본능과 감정행위를 일컫는다 생각하면 된다.

칠정(七情)은 좋은 것은 좋아하고, 싫은 것은 싫어할 뿐이다. 단순한 것이다. 이성(理性)은 좋은 것도 싫어할 수 있고 싫은 것도 좋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아마 이제마가 동의수세보원을 쓸 당시에도 " 이성 " 에 대한 대략적인 개념이나 관점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성(理性)이라는 기호는 없었다. 그뿐이다. 턱, 가슴, 배꼽, 배, 머리, 어깨, 허리, 볼기와 관계되어 나타내지는 표현들은 " 이성 " 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개념들과 관련이 많다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적인 행위라 할 수 있는 주책, 경륜, 행검, 도량과 식견, 위의, 재간, 방략등은 모두 엑기스(일어 : エキス, extract에서 나온말)를 뽑듯이 이상적인 " 이성 " 에서 필요로 하는것만 행위되어 나오지는 않는다. 인간의 주책, 경륜, 행검, 도량은 더할 나위없이 간사하기도 하고(邪), 식견, 위의, 재간, 방략등은 더할 나위 없이 오만하고 게으르기(怠) 도 하기 때문이다. 즉 이성적인 행위는 칠정에 의해 깊게 영향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감정 역시 이성에 영향받는다.

단군 가륵은 천하의 대본은 우리 마음의 중일(中一)에 있다 하였다. 이성과 감정의 적절한 조화와 균형이 중용(中庸)이라 한다면 중일(中一)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 절대적인 가치, 공통분모적인 가치를 지닌 개념을 갖고 있다 할 수 있다. 단 그것은 하나의 기호가 아니다. 선(善)도, 사람도, 자비도, 과학도, 기독교도, 불교도, 유교도, 이슬람교도 아니다. 하여간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