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시, 세회, 인륜, 지방은 대동(大同, 모두 같고)이고

사무, 교우, 당여, 거처는 각립(各立, 각각따로 서는 것)이다.

주책, 경륜, 행검, 도량은 박통(博通, 널리통하는 것)이고

식견, 위의, 재간, 방략은 독행(獨行, 홀로 행하는 것)이다. 」

대동, 각립, 박통, 독행 모두가 알듯하면서도 개념을 잡기가 힘든 말들이다. 그렇다고 대동, 박통은 보편을 말하고, 각립, 독행은 특수한 것을 말한다고 서구철학과 니코르(=)를 시켜 규정할 수도 없다. 서로 다른나라의 언어에는 조금씩 쓰임새가 차이가 있기 때문이고 이 차이는 바로 구별된 기호가 되어 큰 차이를 만들수있기 때문이다.

·대동

대동은 대동으로써 각립은 각립으로써 이해를 하여야 하는편이 처음엔 생소하고 어렵지만 나중에 익숙해 지고나면 더 편할 것이다. 대동과 각립은 천기와 인사를 말할 때 어느정도 저절로 설명이 되어졌다. 대동은 모든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져 있고 수동적으로 받아 들여져있는 현실이자 세계이다. 그래서 크게 같다이다.

·각립

각립은 대동의 세계속을 살아하는 각각의 인간이다. 천기속에서 거처를 하고, 당여에 속하며 교우를 하고 사무를 하는 것은 각각의 인간들이 그나름대로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 따로선다. " 이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홀로선 존재, 소외되어있고 고립된 한인간은 죽기전까지는 비어있는 시간을 어떡해서라도 메꾸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현실이 연극이라면 인간은 서로간에 관객인 것이다.

바람이 가는 곳을 묻지를 말라

아침에

눈을 뜨면

나는 웃음진

아내와

딸의 얼굴에

바람같은

타인의 슬픔을 본다

- 이봉래 타인의 하늘 中 -

어느날 햇볕이 뼈를 녹일듯하던 날 잠시 낮잠에 빠졌다가 잠이 깨어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컴컴하고 고개를 돌리면 눈이 부신 바깥이 보이며 잠시 딴 세상에 와있는 듯한 착각이 들어 보았던 경험이 있는지 모르겠다. 사람은 저마다 서로 타인이다. 그렇다면 사람이라는 명칭은 타인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타인은 사람, 사람은 타인이다. 타인은 타인을 비웃지만, 그것역시 상대적이다.

동 화

옛날에 어느 소녀는

날마다 날마다

내일은 오늘과 다르기를

바라면서 살았답니다.

- Gloria Vanderbilt -

단지 이것이 소녀의 마음일 뿐일까?

·박통

박통은 말그대로 널리 통하는 것이다. 한 인간의 머릿속의 구상은 자신을, 주변을 국가를 세계사를 바꾸기도 한다. 공자, 예수 ,석가 ,레닌 ,나폴레옹 ,징기스칸등 수많은 철학자들이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한 인간의 주책과 경륜, 행검, 도량에서 나온 어떤 구상은 이제 다른 사람에게 전파될 것이고, 그것이 어찌 될 것인가는 차지하고, 이제 그 사람의 머리에서 되어 나온 것은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하여 질 것이다. 영어로 말하면 wide하게, communication 이 된다는 것이다. mass media가 발달되어 있는 오늘날에는 그야말로 박통도 쉽게 되어질수 있을 것이다.

·독행

독행 역시 말 그대로이다. 홀로 행하는 것이다. 같은 사람이 두 명 있다는 것은 옹고집전 같은 소설속에서나 있는 이야기이고 인간은 스스로 앞에 나서든 뒤에서 조종을 하든 홀로 그 모든 것을 하여야 할 것이다. 스스로 결단을 내리고 남의 도움을 받아도 결국엔 스스로 분석을 하여 평가하고 판단을 하여야 할 것이다. 무엇을 선택하건 어떻게 행동하건간에 그 행동은 자신의 의지와 책임하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이끌어내보면 " 실존사상 "도 이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대동은 하늘이요, 각립은 사람이다. 박통은 성품이요, 독행은 명(命)이다. 」

- 원 문 -

이런 생각을 하여보자. 내가 공자만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다. 염유가 공자에게 " 선생님의 도는 너무 높아 감히 따라 갈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공자는 " 너는 매사에 선을 긋는 것이 문제다. " 라고 말해주었다. 그럼 염유는 어쩌란 말인가? 유학의 행동론은 " 全一 " 이라 말하고 싶다. 하나의 목표를 정해 그야말로 몸과 마음을 바쳐 매진 하는 것이다. 순자가 특히 全一을 강조하였는데 " 회의주의 " 란 유학에서는 있을 수가 없다. 모든 것은 사서십삼경과 옛 성현의 말씀에 모두 들어있기 때문이다. 오직 경전을 외워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가뭄이 들건 풍년이 들건 골방구석에 않아 책이나 읽으면 되는 것이다. 세상만사는 천명이고 음양의 법칙이니 그에 순응해 적절히 살아가야 할 일이었다. 그저 험한 세상에서 처세와 안위나 걱정하게 되고 신분이 좋거나, 옛 책들을 잘 암송하고 시와 논설을 잘 써 시험에 붙어 공무원이 되면 일단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500년을 두고 밤낮 골방구석에 앉아 공자왈 맹자왈이나 하였을 것이다.

옛날에 이러했을까? 500년을 두고 형성된 이 관념은 이제는 모든 사람의 습성속에 뿌리 박혀 있다. 인생의 경험이나 관록이야 어떻건 영어시험 잘보고, 법전만 달달외면 이제 스무살 된 사람도 미셸푸코가 말하는 지식과 권력의 자리에서 사람의 생과 사를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나라는 어느 나라일까? 모든 것은 법전대로 하면되고 법전속에 있기 때문일까?

유교를 아울러 다른 종교나 이념을 욕되게 하고싶은 마음은 없다. 불교가 없었으면 우리는 지금 라마교(이것도 불교 이지만)를 믿고 있을 지도 모르고, 유교가 없었으면 벌써 한반도는 몇조각으로 더욱 분리되어 있거나 아예 수 백년 전부터 일본말을 쓰고 있을지도 모를 것이다. 기독교가 없었다면 그나마 이정도의 민주주의 체제도 갖추기 힘들었을 것이며, 자본주의가 없었다면 아직도 보리고개를 넘어야 할지도 모른다. 공산주의 이론이 없었으면 아직도 이 땅위의 노동자들은 서구 자본주의와 자본가들에 의해 돈을 만드는 부속품으로밖에 취급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며, 서구의 철학과, 의학, 과학이 없었다면 아직도 기우제를 지내고 마마와 홍수에 사람들이 쓰러지며 세계각국의 소식을 내집 안방에 누워서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회의(懷疑)하는것에 인색했던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회의가 없으니 행동가는 많아 진리와 도덕이 무성하였지만 가난과 수탈이 난무하였던 왕조였었다. 그러한 왕조가 500년을 이어 내려왔고 그 문화가 일으킨 작용들은 사회의 구석구석에까지 스며들어 풍토가 되어 버렸다. 당연히 회의를 일으키는 사람들에 대해선 사람뿐 아니라 문화자체가 흥분할 것이다. 그것은 또 그 문화가 잘 회의하는 탓이기도 할 것이다.

「 귀는 좋은 소리를 좋아하고 눈은 좋은 빛깔을 좋아하며

코는 좋은 냄새를 좋아하고 입은 좋은 맛을 좋아 한다.

좋은 소리는 귀에 순응하고, 좋은 느낌은 눈에 순응하고

좋은 냄새는 코에 순응하고, 좋은 맛은 입에 순응한다. 」

- 원 문 -

인간의 본성은 선할까?, 악할까? 아마 이 의문은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을 것이다. 현실적인 일들이 그러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 저마다 다르고 단어라는 것이 글자라는 것이 상대적인 개념이 있고, 대상자체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호를 가지고 감각되는 현상의 이미지와 느낌을 표현하는 법을 알게되며 인간은 마치 오뚜기로 구성된 도미노 게임을 하는 것일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야 차지하고라도 우선 인간은 계속적으로 먹어야 하고 쉬어야 하고 불안을 해소해야 한다. 아프면 그 아픔을 없애고 싶고, 성욕을 느끼기 시작하면 풀어야 하고, 비어있는 시간에 의한 심심함을 메꾸어야 하고 긴장과 불안을 느끼면 해소시켜야 한다. 이러한 면 이외에도 먹고자는 걱정이 없어도 사고행위를 할 줄 아는 인간이란 동물은 계속 무언가를 상상하고 있고 떠오르는 이런저런 생각을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에게 무언가 감각될 때 반드시 이것이라고만 표현 할 수는 없지만 인간은 그것에 " 자극 " 된다 할 수 있고, 이에 따라 곧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 반응 " 이 일어날 것이다. 이때 인간은 어떻게 반응할까? 이 때 인간은 자신의 지식의 벽속에서 생각하여 왔던대로 생각하고 있던대로 생각할 것이다. 무의미한 동어의 반복일까?

「 어떤 단어를 강조하기위한 가장 뛰어난 방법은 그것을 <영원히>생략해 버리거나

췌사적인 은유 또는 뻔히 드러나는 우회적인 언어에 호소하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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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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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두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우주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 입니다.

- 보르헤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中 -

난 이 우주를 인간의 마음이라 하여보고 싶다.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전달하는 좋은 방법은 단지 하나의 단어로써 또는 ' ∼은∼이다. ' 식의 명제로써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 물론 석가와 가섭간의 이심전심이라 할 분들도 계시겠지만 - 그런데 그럴만한 능력이 없으면 이렇게 말도 많아지고, 논리도 난잡해지며 그에따라 오해와 오필도 책의 단어수에 비례해 많아질 것이다.

인간의 사고는 자기가 편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자기가 알고 있고 경험해왔고 익숙한 범위 내에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달달 욀 정도의 지식을 가진 사람도 결국 고립된 타인일뿐이다. 필자의 모든 의견은 편견이고 기껏해야 하나의 일리있는 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