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턱, 가슴, 배꼽, 배 속에는 저마다 쉬지않는 지혜가 많이 들어있다. 그러나 교만하고 잘난체 하는 사사로운 마음이 갑자기 이를 무너뜨리면 스스로 그 지혜를 버리고 널리 알수가 없게 된다.」

- 원 문 -

비단 사사로운 마음 탓만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귀는 소리를 가려내 들을 수 있다. Rock group의 연주를 듣고있을 때 인간은 드럼소리, 올갠소리, 베이스 기타, 리듬기타, 훠스트 기타 소리를 가려내 들을 수 있다. 가령 당신은 Pink Floid 의 연주에서 베이스 기타 소리만을 가려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이때 당신귀에는 다른소리는 들리긴하되 제대로 속으로 따라부를 정도로 들을 수가 없다. 이것은 귀의 능력탓이 아니라 뇌의 능력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각은 무엇인가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다른 무엇인가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방향 또는 관심의 초점이 어떤 하나에 맞춰져 있다면 더구나 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교, 긍, 벌, 과에 맞춰져 있다면 더 더구나 일 것이다.

「 머리, 어깨, 허리, 볼기 밑에는 저마다 쉬지않는 행동이 크게 있다. 하지만 사치하고 게으른 욕심이 갑자기 이것을 빠뜨리면 스스로 그 행동을 버리고 올바른 행동을 할 수가 없게 된다.」

- 원 문 -

유학은 직접적인 행동과 실천궁행을 중요시한다. 공자는

「 제하나 몸도 제대로 못추스리면서 천하는 구하려 한다는 노장사상가들의 비아냥에 그래도 새와 짐승과 함께 살수는 없지 않는가? 」

말하고 있다. 그러나 묵자에게는 입으로는 仁이니 義니 하면서 제몸 추스리기에 바쁘다는 비야냥을 받았다. 그리고 맹자는 이에 대해서 묵가는 중용의 도를 지키기 못하고 있다고 받아친다.

노장사상가들 보다는 모순된 행동을 했고 묵자보다는 행동적이지 못했지만 어쨌건 공자는 혼란에 빠진 천하는 바로잡아 도덕적 윤리적 이상사회를 건설하겠다는 것을 목표로 실천궁행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공자의 의도와는 달리 대다수의 조선시대 선비들은 골방구석에서 공자왈 맹자왈 하면서도 이제나 저제나 입신양명하여 한바탕 멋들어지게 행동할 것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러한 문화속에선 그러한 사람들을 욕할 수도 없다. 오늘날 망국적으로 치닫고 있는 '과외'현상에 대해 누구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 귀, 눈, 입, 코는 사람마다 모두 지혜롭고 턱, 가슴, 배꼽, 배는 사람마다 어리석다 폐, 지라, 간, 콩팥은 사람마다 모두 어질고 머리, 어깨, 허리, 볼기는 사람마다 모두 못났다.」

- 원 문 -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 바탕은 모두 선하고 어질은데 그 앎을 실천함에 있어 모두 어리석고 못나게될 경우가 많다는 말일 것이다.

탈, 치, 나, 욕 종류의 반드시 목표를 이루려거나 힘이 들면 대충 뚝딱해버리거나 도중에 그만두고픈 심리는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때문에 공자는 克己를 매우 중요시 하였을 것이다. 그럼 사람은 무엇을 위해서 자기를 극복하여햐 할까? 그저 하나의 완성된 인격체가 되기 위해서일까?

공자는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음을 알았다한다. 우리는 산의 정상에 서면 그 다음엔 내려가야 한다. 대중가요중에 " 나 산꼭대기에 오르니 더오를 곳이 없더라 " 는 가사가 있다. 잘은 모르지만 거의 모든 인간은 절대 스스로는 내려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올라가 있는 것을 좋아 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라도 인간은 죽을 때까지 올라가야만 한다. 그는 시지프스처럼 다시 내려왔다 올라가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더 오를곳이 없을 때 그는 신이거나 완전히 이기주의자가 될 것이다.

사람들의 귀, 눈, 입, 코는 하늘이니 하늘은 지혜롭다. 사람들의 폐, 지라, 간, 콩팥은 사람이니 사람들은 어질다. 나의 턱, 가슴, 배꼽, 배는 저절로 내 마음이 되지만 어리석음을 면치 못하니 나의 어리석음을 면하는 것은 바로 나에게 있다. 나의 머리, 어깨, 허리, 볼기는 저절로 내몸이 되지만 못난 것을 면치 못하니 나의 못남을 면하는 것은 바로 나에게 있다.

- 원 문 -

이율곡은 사람이 한 번 " 성인 "이 되겠다는 목표를 정했으면 털끝만큼의 흐트러짐도 없이 철두철미 맹진 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극기(克己)에 관한 글이다. 克己, 正己등은 모두 공자와 맹자가 즐겨쓰던 말들이다. 克己, 正己를 위해서는 인위적인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노자나 장자는 유교의 이러한 인위적인 노력을 과소평가 한다. 결국 대다수의 낙오자나 허위의 인간들을 만들 것이 뻔하기 때문이리라. 노자는 道를 잃은 뒤에야 德이 생겨나고 , 德이 없어진 뒤에야 仁과 義와 禮가 나타난다 하였다. 노자나 장자가 추구하는 바는 억지나 인위가 아닌 자연스런 無爲라 할 것이다. 그러나 기호에 얽매이게 되면 자연스럽고자, 노력하는 것도 인위요 억지가 될 것이니 유위나 무위나 그저 흉내라도 제대로 내면 될 것 같기도 하다. 하긴 "무위"라는 기호를 통해 실제 자연스러움에 접근할 수 밖에 없기도 하다.

「 上德不德 是以有德 下德不失德 是以無德

上德은 無爲而無以爲 하고 下德은 爲之而有以爲 」

- 도덕경 -

뛰어난 덕은 덕이 아니기에 덕이 있고 못난덕은 덕을 잃지 않고 있기에 덕이 없다. 그렇기에 뛰어난 덕은 함이 없고 없음으로써 하며, 못난덕은 함이 있고 있음으로써 하게된다.

그저 물이 흐르듯 바람에 나뭇잎이 굴러가듯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이리라.

고유의 우리민족 사상중에 풍류도(風流道)가 있다. 지금은 그저 잘 놀러 다니거나 자연을 즐기며 시나, 노래를 부르며 멋스럽게 행동한다는 껍데기만 남았지만 과거에는 그렇지가 않았을 것 같다.

삼성기에 아주 오래전 옛날 사백력의 하늘에서 홀로 신이되어 지극한 氣를 타고 노닐었다는 글이 나온다. 이때의 氣는 바람의 흐름 곧 풍류로 생각된다. 풍류란 바람의 흐름처럼 자유스럽고 자연스러운 것을 뜻했을 것 같다. 풍류도는 매우 신축성이 있는 사상이었을 것이다. 하늘과 땅사이를 거침없이 오가는 바람처럼 모든 것 위에 자유롭게 오가는 것이 풍류도의 이상이었을 것이다. 풍류의 마음속에는 종교도 이념도 사상도 자연스레 용해된다. 기호들은 모두 인간이 창조한 것일 뿐이다. 어떠한 종교, 이념, 사상도 용납하고 포용하여 보다 나은 인간과 세상을 이루고자 하는 것, 이것이 또 인내천이요 홍익인간의 사상이 아니겠는가? 이에 비하면 상덕이니 하덕이니 유위니 무위니 하는 것 조차 헛된 말장난이다. 그러나 그러기에 풍류도는 도가사상 이상으로 공허하기도 하다.

「 하늘이 만백성을 낼 때 성품은 지혜로운 지각으로 마련해주니 만백성이 사는데는 지혜로운 지각이 있으면 살고 지혜로운 지각이 없으면 죽는다. 지혜로운 지각이란 덕에서 생기는 것이다. 」 - 원 문 -

정약용은 청렴한 것이 모든 덕의 근원이라 하였다. 나이좀 드신분들에게서 가끔 들을 수 있는 말 가운데 " 인덕이 없다 " 느니 " 음덕이 없다느니 " 하는 말들이 있다. 이외에 다재박덕 하다는 표현도 그리 낮설게 들리지는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이제마는 지혜로운 지각이란 덕에서 생긴다고 한다. 덕(德), 필자도 그런것좀 가졌으면 좋겠다.

「 하늘이 만백성을 낼 때 명해서 자업을 마련해 주니 만백성이 사는데는 자업이 있으면 살고 자업이 없으면 죽는다. 자업이란 도(道)에서 생기는 것이다.」

- 원 문 -

德을 말하더니 이제는 또 道를 말하고 있다. 道와 德이라는 단어는 유학에서 뿐만아니라 도가에서도 많이 쓰는 말이다. 道는 길이라는 뜻이다. 지금의 길이야 불도저로 밀어내고 아스팔트 깔아버리면 되지만 옛날에는 자연스럽게 오가던 점적인 발걸음들이 세월을 두고 이어지며 길을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이는 인위적이기도 하고 자연적이기도 하다 하겠다. 길 역시 생기게 된 까닭을 살펴보면 理에 따라 즉 결에 따라 만들어 졌을 것이다. 흐름을 따라 오르고, 내리고, 굽고, 뻗어나가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도가에서 말하는 道의 개념이 직관될 수 있을 것이다.

유학에서 말하는 道는 나야할 곳에 길이 나야 하고, 나지 말아야 할 곳에 길이 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 요순 " 일 것이다. 이제마는 유학자이니 유학에서 말하는 道에 대해 말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