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의예지와 충효우제등 모든 착한 행동은 모두 지혜로운 지각에서 나오고 사농공상이나 전택방곡 등의 모든 소용은 모두 생업에서 나온다. 지혜로운 지각은 남의 일까지 겸하고자 해야만 사람을 가르칠 수 있고 생업은 자기몸이 청렴해야만 공을 세울 수가 있으니 지혜로운 지각이 적은자는 아무리 뛰어난 데가 있다해도 조조처럼 교활하면 가르칠 수가 없고 생업을 함부로 하는자는 아무리 잘난자가 있다해도 진왕(진시황)처럼 사나우면 공을 세울 수가 없다. 남의 착한 행동을 좋아하면서 자기도 역시 착한일을 할 줄 아는 것은 지극한 성품의 덕이 있는 것이요, 남의 악한 행동을 미워하면서 자기도 반드시 악한일을 행하지 않는 것은 바른 천명의 도(道)이다. 지혜와 착한행동이 계속되면 그것이 바로 도덕(道德)이요 도와 덕이 이루어지면 그것이 바로 인(仁)이요 성(聖)이다 그러니 도덕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지혜와 행동이요 성품과 천명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지혜과 행동이다. 」

- 원 문 -

유학에서 잘 사용하는 교훈적인 글이다. 인간의 성격을 흔히 야누스에 비유하기도 한다. 집에서는 자상한 아버지요, 남편이 직장에서는 폭군일 수 있다. 직장에서는 사람좋은 사람이 가정에서는 인륜을 짓밟는 파렴치범일 수도 있다. 얌전하고 착실한 사람이 핸들만 잡으면 거리의 무법자 일 수도 있다. 누구든 어느정도는 이와같은 행위를 하거나 마음이라도 가질 수 있다.

얼마전 유치원 아이들을 이용, 자신의 변태적 행위를 만족시킨 모 유치원장은 직장과 가정, 동네 모두에서 모범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그것이 보상심리건 자신의 치부를 숨기기 위한 행위였건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더 모범적으로 행동했을 것이다. 인간은 항상 프루스트의 길위에서 키에르케고르의 고민을 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냐!, 저것이냐! 는 항상 햄릿의 사느냐!, 죽느냐! 만큼 극단적이고 심각한 상황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물건을 살까? 말까?, 이리갈까? 저리갈까? 일어설까? 앉을까? 아는척 할까? 그냥 가만있을까? , 먹을까? 말까? ,이걸 먹을까? 저걸 먹을까? 등등 이분적인 사고행위 속에서 인간은 저도 모르게 이분법의 문을 통해 세상을 엿보려 하게 될 것이다. 선과 악, 삶과 죽음 정신과 물질, 돈과 명예, 명예와 권력, 공과 사, 색과공, 부르조아와 프롤레타리아, 정과 반 등은 양자택일적인 버릇에서 생긴 인간만이 만들어 놓을 수 있는 기호와 관념들일 것이다.

「 그 마음을 가지고 있는자는 그 마음을 책망하는 자이다. 마음의 본체의 밝고 어두운 것이 비록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 같지만 마음을 책망하는 자는 맑아지고 책망하지 않는자는 흐려지는 것이다. 말의 깨우쳐준 마음은 소의 마음보다 몹시도 약다. 그것은 말의 책망하는 마음이 소보다 약기 때문이다. 매의 기세는 솔개보다 사납다 그것은 매의 책망하는 기운이 솔개보다 사납기 때문이다. 마음의 본체가 맑고 흐린것이나 기상이 강하고 약한 것은 소나 말, 매와 솔개에 있어서도 이치로 따지면 이러하거늘 더구나 사람에게 있어서랴 그 차이는 혹 곱절이나 혹 다섯곱절이 되기도 하고 혹은 천곱절, 만곱절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어찌 나면서 부터 그대로 얻어가지고 멍청하게 앉아서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서 저절로 그렇게 되겠느냐 」

- 원 문 -

유학에 이러한 글들이 많이 있지만 이제마 역시 정기(正己), 극기(克己) 등의 행위와 생각을 중요시 하고 있다. 正己, 克己를 하는 방법중의 하나가 책심(責心)임을 역설하고 있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말하지 않는 사람은 나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

- 공 자 -

이런 자세를 자주 갖는것도 스스로를 책심(責心)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턱대고 스스로를 담금질하고 꾸짖기만 하여서도 안될 것이다. 반성만 하는 사람은 결코 성공할수 없다.

한웅이 세상에 내려올 때 무리 삼천과 칼, 북, 거울의 천부인 세가지를 갖고 내려왔다 한다. 이중 거울은 왜가져 왔을까? 스스로를 돌이켜 보라는 의미일까? 자기자신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일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가장 모르기도 한다.

탈무드에 이런글이 있다. 두 명의 굴뚝소제공이 있다. 어느날 둘이서 굴뚝청소를 하고 나왔다. " 가 " 와 " 나 " 이들 두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쳐댜 보았다. " 가 " 가 보기에 " 나 " 의 얼굴에는 검뎅이가 묻어있었고 , " 나 " 가 보기에 " 가 " 의 얼굴은 깨끗했다. 이 때 누가 집에 돌아가 얼굴을 씻으러 갈까? 아시겠지만 탈무드에는 정답이 없다. 탈무드는 옳고 그름을 가르쳐 주는 책의 기능 보다는 진지한 생각을 하게 하려는 성격이 더 강하다. 서로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고 그 즉시 헤어졌을 때 얼굴을 씻을 사람은 검뎅이가 묻지 않은 " 가 " 일 것이다. 서로 말을 하여준다면 얼굴을 씻을 사람은 " 나 " 일 것이다.

그러나 얼마든지 다른 답이 나올 수 있다. 정확한 답만을 찾으려다간 수많은 답에 얽매여 본질을 파악치 못할 것이다. 어쨌건 첫 번째로 나온 답변을 생각해 보자. 사람은 물론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가장 잘 알겠지만 때론 아니 너무나 많은 경우에 있어 스스로를 모른다. 그것은 남과 다른 스스로이다. 자신의 생각이 기호로 표현될 때 자기 스스로는 그 생각밖에 더 이상 알 수가 없지만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다른 사람은 자신과 다른 나의 생각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점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같다. 애들러의 아동심리연구에 의하면 아이들이 가장 일찍 깨닫는 대타적인 능력은 " 비교 " 하는 것이라 한다. 비교는 남과 자기의 같은점과 다른점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이것은 남과 자기가 다르게 취급될 때 가장 쉽게 알아 차릴 것이다.

구별의 시작이다. 그리고 절망과 번뇌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러나 살아가는 우리는 사회속에 있다. 결국 스스로의 책심도 중요하지만 자기외의 사람들의 말을 객관적으로 잘 수용하고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이 된다. 물론 적절한 의견이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과 다른 것을 쉽게 알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무리 홀로 깊게 생각해 봐야 우물안 개구리밖에는 안될 것이다. 아마 그래서 공자도 세사람이 가면 틀림없이 그 중에 자기의 스승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물론 거의 모든 인간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렇게 행위하고 있을 것이다.

소리나 빛은 입자와 파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인간의 사고 행위나 인간들이 엮어내는 갖가지 상황과 인간의 마음을 " 상대적 " 이고 " 절대적 " 인 생각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많을 것이다. 가령 한국을 예로 들어보자, 정부 여당의 상대되는 세력에는 야당들이 있다. 그러나 이 야당들은 언제까지나 여당에게 상대적으로 있지만은 않다. 경우에 따라 이해관계에 따라 여야 국회의원들은 어떤 세력에 의해 한데 뭉뚱 되어져 상대적인 위치에 놓일 수 있다. 여론의 질타를 받으면서도 스스로의 세비인상에 대해서는 일사불란하게 단결하는 모습을 보라. 비단 이런 역학관계가 정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국적인 노조가 있고 경제계가 있고 군부도 있고 종교계도 있고 각종 민간단체도 있다. 수많은 노조는 각기 자신들만의 현실이 있고 종교계, 경제계, 정치권, 그밖의 모든 집단들이 그러하다. 이것을 대별하여 부르조아와 프롤레타리아나, 기득권층과 민중등으로 대별하여 놓으면 인식하기에는 좋지만 너무 기계적이고 편벽된 생각은 아닐까? 노조원 수만명, 수천명으로 구성된 노조가 있는가 하면 불과 수십명으로 구성된 노조가 있다. 오늘도 평범하게 버스를 타고 동사무소에 나가 호적담당을 하는 사람들도 기득권층일까? 아니면 기득권층의 하수인일까? 밖으로 나오는 학생들에게 최루탄을 쏘는 전경이라고 선거때 모두 여당만을 찍지는 않는다.

◎ 음양과 사상

음양론은 우주, 인체, 현상세계를 음양으로 분류하여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라 했다.


[ 표 1 ]

그러나 음과 양을 설명하기 위해선 다른 기호들이 필요로 되어진다. 그 기호들 중에 물과 불 이라는 기호가 선택되어 질 수 있다. (아마 물이 선택되면 불은 자동적으로 선택될 것이다.)


[ 표 2 ]

[표 2] 그림은 가장 단순화된 그림이다. 물과 불의 자리에는 상승·하강, 하늘·땅, 분열·수렴등 서로 상대적인 의미를 가진 모든 단어들이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 표 3 ]

그림상으로는 A와 B가 상대적이고 C와 D가 상대적이다. 그리고 A와 C , A와 D, B와 C , B와D는 서로 연관된 개념일 수도 있고 상대적일 수도 있다. 표2를 따른다 해도 A(음)는 D(물)와 B(양)는 C(불)와 관계가 깊지만 그렇다고 A = D가 되고 B = C가 될 수 없다.

ABCD는 각기 별개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음은 물을 말하지만 그리고 물은 생명을 말하지만 때로 음은 죽음을, 양 즉 불이 생명을 말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ABCD는 필요에 따라 필요한 사항을 서로 공유하거나 서로 구별하는 것일뿐이다. 상대적인 것은 가장 구별되는 것을 가리킨다. 요약하면 ABCD는 각기 별개의 기호일 뿐이고 A와 B, C와 D는 상대적이며 A와 C 혹 A와 D, B와 C 혹 B와 D는 서로 관계되어 질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구별되어져있는 기호이고 생각하는 사람의 의미부여 여하에 따라 어떻게든 조합될 것이다. 비단 자연의 질서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엮어내는 여러 가지 현상을 이런 방법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떨까 한다. 그것이 어느 만큼 타당할지는 개인의 능력일 것이다.


[ 표 4 ]

경제를 ○의 중심에 놓고 생각하면 A의 자리에 미시경제가 있다하면 B의 자리에는 거시경제가 자리잡을수 있을 것이다. C의 자리에 수출위주 경제가 있다하면 D의 자리에는 안정위주 정책이 자리잡을수 있을 것이다. 때에따라 A는 C와 D의 이론을 이용하고, B는 C와 D를, C는 A와 B를, D도 A와 B를 서로 자신의 목표의 도구로 삼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무한으로 미분할수 있으며 전체적으로 경제를 만들 것이다.

현상세계는 ABCD뿐아니라 무한미분으로 분석하여 들어갈수 있을 것이다. [ 표 4 ] 그러나 단지 넷으로 요약한 것이 [ 표 3 ] 이다. C가 A와 연계됨에따라 D는 B에 가까워지고, C가 B와 연계됨에따라 D는 A에 가까워질수도 있다. 그러나 C가 B고 D가 A는 아니다.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그 기호는 수많은 기호중 단지 하나인 것이다. 우리말로 하여 " 외진하나 " 일뿐이다. 이것이 기호의 특징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기호는 인간의 관념을 형성하기에 인간세계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기호를 가지고 행위하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성명론에서의 필자의 촌스러운 견해를 끝마친다. 교양적인 지식정도로 가볍게 읽어주기 바란다.